서론
- 한가지 질문을 드려보겠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 사람” 이 되었을 때에, 예전의 나의 행동이나 성격이 급격하게 달라지셨는가?
- 물론 저 같은 모태신앙자들은 또 다른 질문을 해야하겠지만, 보통 많은 경우에 급격하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혹은 달라진 듯 했으나,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고는 한다.
-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아서, 밥을 다 먹으면 아이스크림을 주겠다 하고 밥을 먹였다. 그랬다고 해서 다음 번에 아이스크림 없이 밥을 스스로 잘 먹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 은혜를 그저 “받는 것”으로 정의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은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 혹은 망각하게 될 때에, 아이처럼 다시 밥을 안 먹게 된다.
-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 자체를 넘어, 그 은혜를 받은 “나” 를 돌아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 은혜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아이도 자라 만약 그 순간을 기억한다면 (기억 못하겠지만) 아이스크림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까지 부모님이 밥을 먹이려 노력했는가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 바울이 그랬다. 바울은 그 시대에 지성이고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의 시민이었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연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나니 느끼지 못하지만, 외국인으로 시민권을 따는 것은 그 어떤 자격증 시험보다 어렵다. 우리나라 시민권도 마찬가지다.
- 그런 바울이 자신을 바꾸어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은혜 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낮은 자로 살기를 선택할 수 있게된다.
- 오늘은 바울을 통해 낮아지는 삶에 대해 나누어 보고자 한다.
본론
로마시민 바울
- 로마제국 시데에 로마는 지중해를 둘러싼 모든 나라를 지배했다. 그 전체 인구 중에 70%가 노예였다가 예수님 시절에는 한 절반 수준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 절반은 노예고, 나머지는 자유인인데, 자유인이라고 다 로마시민인가? 아니다. 로마시민의 지위는 극히 일부만 누리는 특권이고, 바울 당시에는 본문의 천부장처럼 큰 돈을 들여 로비를 통해 시민이 되거나,
- 군복무를 몇십년 하거나, 로마군이 전쟁할 때에 도와 준다거나, 노예를 해방시켜주거나 할 때에, 예외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바울이 로마시민을 밝히자, 모든 결박이 풀어지고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시민이다 라고 밝히는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내가 누군지 알어” 와 비등한 것이다.
- 바울은 그러나 이 막강한 시민권을 대놓고 활용하거나, 이용하지 않는다. 부당하게 묶여 쇠나 뼈가 달리 가죽 채찍에 맞을 정도 되니까 드러내 놓고 사용한다. 그것도 타 지방에서는 그 지방 신자들에게 해가될까 싶어 드러내지 않았다.
- 왜 바울이 돌에 맞고, 태형을 견디고, 두들겨 맞고 하는 것을 견뎠을까?
- 그것은, 자신이, 기독교인들에게, 스데반에게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견디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 자신이 괴수 중에 괴수고, 그런 죄를 용서 받았음이 바울이 그렇게 살 수 있게 해준 힘이다. 탕감 받은 것이 많은 자가 더 사랑한다 하셨다.
- 우리가 탕감 받은 죄의 크기는 얼마인가?
- 은혜 받을만한 자격 없는 “나”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는줄로 믿는다.
바리새인 바울
- 바울은 로마시민일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민중의 선생을 자처했다. 존경 받고, 특히나 바울은 엘리트로써 유대인 사회의 중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 본문에서 바울은 “나는 바리새인이다” 라고 고백을 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어서 이십년간을 전도하고도 여전히 스스로를 “바리새인”으로 분류했다.
- 바울에게 바리새인이라는 정체성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 그 자체였다.
- 그렇게 스스로 바리새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들을 누릴 수도 있는 바울이 그것을 누리지 않고 과감히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기를 자처할 수 있는 것은, 말씀드렸다시피, 은혜받은 “나”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이다.
- 우리가 은혜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런데 누리고 있다.
- 우리의 신앙이 은혜를 “받는 것” 을 넘어 은혜받는 “나”에 대한 깊은 성찰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이방땅 나그네 바울
- 바울은 사회의 중심에서 철저히 벗어나 타지에서 20년간 완벽히 이방인으로 살아갔다.
- 중국을 다녀온 청년도 있고, 이탈리아를 다녀온 청년도 있고, 미국을 다녀온 저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살다온게 비록 2천년 지난 시점이지만 바울과 가장 비슷한 경험일 것 같기는 한데, 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 이방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 내가 지금까지 인생에서 쌓아온,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들, 인맥, 경험, 사회적 위치가 완전히 바닥으로 리셋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시라, 말도 못해, 행동도 이상해, 생긴 것도 이상해, 친구도 없어. 최악의 조건이다.
- 그러니까 자기 민족끼리 모여서 삼삼오오 도시의 변방에서만 어울리는 것이다. 요즘 군자동에 그런 외국인들 천지다. 볼 때 마다 저를 보는 것 같아 짠하다.
- 바울은 이 생활을 20년 했다. 그것도 한 곳에서가 아니라, 계속 옮겨가면서. 가는 곳마다 바울에 대한 반응이 달랐는데, 그 말 즉슨 가는 곳마다 문화와 사람들이 달랐다는 말이다.
- 로마시민권과 엘리트 바리새인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이방인을 자처하는 삶을 그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린다.
- 은혜를 받은 자신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 한량없는 은혜와 그 은혜를 받은 나를 항상 기억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시지 않으시고, 하늘 보좌에서 마굿간으로 내려오신 겸손의 왕이시다.
- 바울은 노예가 50%가 넘던 로마제국에서 시민권의 특권을 누리거나, 한 나라의 종교지도자들의 자리에 서는 것을 마다한채, 나그네가 되어, 자신들의 민족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그들과 함께 구르는 삶을 택했다.
- 하나님이 왜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바울을 부르셔서 그렇게 낮아지고 낮아지게 하셨는가? 바로 우리 때문이다. 낮고 낮은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서 인줄로 믿는다
- 우리는 보통 소외 “받는다” 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오늘 저는 소외를 선택하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이 소외는 세상에서 나를 끊어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외된 곳으로 낮아지는 것을 말한다.
- 그런데 말이 쉽지, 올라가는 것 만큼이나 내려가는 것도 어렵다. 바울이 평생을 노력해서 엘리트 바리새인이되었는데, 그걸 버리고 소외된 곳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다멕섹에서의 주님과 만남 정도의 이벤트가 필요했다.
- 우리에게도 그런 놀라운 다메섹의 이벤트가 있다. 그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이벤트이다.
- 나의 죄인됨, 나의 연약함, 나의 은혜 받기에 가당치 않음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낮아질 수 있고, 소외를 선택할 수 있는 줄로 믿는다.
- 성경은 가르친다. 고아, 과부, 나그네, 여성들, 동물들, 약자들을 살피며 보호하라 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교회 안에서, 나의 삶 속에서, 높은 곳들에 눈을 맞추고 살아간다.
-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과 바울의 삶을 따라, 거룩한 소외자의 삶을 선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