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는 사람들의 생각을 “신”에게서 “나”로 옮기는 문화적, 철학적 운동이었다.
- 그 이후로 끊임 없이,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스스로 그 행동의 결과를 책임지는 일에 익숙해져왔다.
- 우리 또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스스로 일들을 주체적으로 알아서 계획하고, 처리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을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이다.
-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설교를 이어가는데, 철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삶들의 주체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본론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손에 달렸다
- 26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테마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이 구절은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족속들은 만들었다는 말이다. 아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이 말을 꺼내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 “너희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창조물은 창조자의 목적에 따라, 어느 곳에 놓여지게 되고, 창조 의도에 따라 사용되어진다. 그리고 그럴 때에 가치가 있다. 그 의도와 목적을 벗어나게 되면, 아무 의미 없는 물건에 불과하게 된다.
- 집에 밀가루, 계란, 우유, 설탕, 기름 같은 기본적인 재료들이 다들 있으실 것이다. 그것들이 그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 미국에서 케이크가 너무 달아서 한국식 케이크맛이 그리워서 스스로 만들어 먹었다. 밀가루, 계란, 우유, 설탕, 기름이 기본적인 재료들만 있으면, 케이크를 만들 수 있다.
- 밀가루 이만큼, 계란 이만큼 우유 이만큼 정해서 너 먼저 그 다음 너 하면서 섞어가야 케이크가 만들어진다.
- 우리의 존재라는 것, “나”라는 존재는 2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만드시고” “정하시고” “한정하시고” 하는 목적과 의도가 없으면, 밀가루, 설탕에 불과한 것이다. 케이크가 될 수 없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여기 있으라 하시고, 너는 여기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살아가도록 정하시고 한정하셨다.
-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의도와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계신 줄로 믿는다.
- 그렇다면, 밀가루 설탕 계란 우유 기름이 “케이크”가 되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 모두 한사람 한사람을 만드시고, 정하시고, 한정하셔서 이루고자하시는 의도와 목적이 무엇일까?
- 27절에 바울은 그 의도와 목적을 말해준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이다
- 바울은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향한 의도와 창조 목적을 갖으신 것은, “혹, 더듬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다” 라고 말한다.
- 그러면서,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라고 덧붙힌다.
- 이 두 문장은 당시 두 유력한 철학 학파인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의 개념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는데,
- 스토아학파는 자연법칙들을 통해 지성을 통해 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고,
- 에피쿠로스학파는 하나님은 자연세계의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는, 무관심한, 멀리 계신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바울은 단순히 자연법칙과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분명히, 우리 모두가 한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났음과 그의 의도 목적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통해 더듬어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를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계심을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이 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성령을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전 삼으사 찾아오셨어야 했는가? “우리에게 멀리 계시지 않기 위해서다”
- 다시 케이크 이야기를 해보자. 케이크를 왜 만드는가? 먹으려고 만든다. 더 원론적으로 이야기 해보자
- 케이크를 왜 먹는가? 탄수화물 중독이라서 먹는 것인가? 당 떨어져서 먹는가? 영양을 생각해서 먹는가? 달달한 것 먹고 기분 좋을려고 먹는다.
- 케이크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먹어져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 인간이 갖는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스바냐서의 말씀처럼, “우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찬양드릴 때, 기도 드릴 때, 말씀 듣고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해 볼 말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아니하다는 말인데, 우리가 평소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사실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있다.
- 내가 너가 엮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 그자체는 이미 하나님을 보고 경험하는 현장이다.
- 나의 삶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우리의 삶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 29절에서 바울은 우상들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소생이 된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하는데, 우상들에 대해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우리가 하나님, 즉 창조자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고쳐야할 잘못된 생각이 하나 있다.
-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손으로 금과, 은과 돌로 우상들을 만들었다.
- 창조된 인간이 창조자인 신을 창조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그걸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케이크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겠다.
- 밀가루 설탕 계란 우유 기름이 서로에게 작용을 하면서, 케이크가 된다. 물론 설탕을 넣어서 계란을 돌려줘야 더 잘부풀기는 한다. 어느 정도 서로 작용하는 역할이 있기는 하다.
-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케이크를 만드는 것은 제빵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설탕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도 그 것을 결국 일어나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 우리가 매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일 작고 큰 창조와 실행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은, 그 창조는 설탕이 계란을 조금 잘 부풀게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의 삶을 통해 의도하신 의도와 목적을 이루어가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 우리가 이걸 잊어버리면, 그리스인들처럼, 금과 은과 돌과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의미 없는 우상들을 만드는데 그치고만다.
- 나의 능력으로 열심히 살고 바쁘게 살아서 남는 것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자의 자리에 설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28절의 고백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힘 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의 삶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결론
- 서론에서 우리가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일을 실행하고, 그리고 결과를 책임지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말씀드렸다.
- 어찌보면, 우리는 필요 이상의 책임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벌인 일이라고,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 성경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의 주체는 “나” 가 아니라,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 케이크는 먹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존재의 의도이고 목적이다.
-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다.
- 이 존재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살아간다면, 나는 필요이상으로 “창조자”의 위치에 서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책임감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다.
-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의 삶의 주인은 나다.
- 삶을 주체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사는 하나님의 소생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