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면 고생
2020년 11월 11일

집 떠나면 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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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감사 · 고생 · 믿음 · 은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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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11

예배일시

2020년 11월 11일

창세기 4:1-11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6.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7.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9.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0.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1.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서론

집 떠나면 고생인 것은 우리의 경험으로 봐도 그렇고,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해서 봐도 그렇다. 부모님하고 살다가 혼자 살게되면, 스스로 해야하는 것이 이렇게도 많았나 하는 것을 그 때에 깨닫게되고, 내 편 하나 없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집 떠나는 스토리의 대표적인 인물은 야곱일텐데, 그가 아무리 친족의 집에 도착했다한들, 삼촌이 부모님은 아니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오늘 또 본문에서 우리는 인류 처음으로 집 떠나는 인물의 이야기를 접한다. 가인이 집을 떠나가는데, 가인은 잃어버린게 너무나도 컸다.

본론

한 번 더 멀어지시는 하나님

본문 6절을 보시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나갔지만 아직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가까이서 말씀하시는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에덴 동산에서는 나갔지만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서 지내고 있고, 예상하기로는 하나님이 에덴동산 끝자락가지는 가까이 오셨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본다. 성막으로 치면 아담과 하와가 지성소에서는 나갔지만 성막 뜰 정도에는 있지 않았나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에서는 멀어졌으나, 보호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인해서 가인의 상태가 부모님 보다 악화된다. 그나마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벗어나 혼자서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알고자하면 모르게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여기서 가인의 대답이 흥미롭다. 가인은 “모릅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 “모른다” 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잘 들 아실 것이다. 우리가 진짜 모를 때는 “진짜, 모른다,” “정말, 모른다” 라고 강조하면서 말한다. 왜냐하면, 혹여나 아는데 모른 척 한다고 오해 받을까봐. 그만큼 이 “모른다” 는 말은 오용, 남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가인이 그 오용의 창시자인 듯 하다.

불과 얼마 전에 그의 부모가 선악과를 먹어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을 얻었다. 그런데, 악을 알아버려서 이제는 “아는데 모른다” 고 말하기 시작했다. ‘알게하는 나무’를 먹었는데, 모르게 되는 아이러니다. 악한 것을 알게되면 우리는 모르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을 떠나서 악을 가까이하면 참된 지식에서는 멀어지게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을 한다. 가인이 차라리 “모른다” 라고 말을 안했으면 좋았을 걸. 악한 건 금새 배워가지고 하나님 면전에서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게 우리가 하나님께 흔히 하는 행동이다. 악한 행동인거 다 알면서 해놓고, 잘 몰라서 한 것처럼 능청 떨고, 성경에 안 써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한다. 모르는게 아니고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잘 안다 무엇이 옳은 지. 하나님 앞에서 “진짜 모랐습니다. 정말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다. 우리는 선한데만 지혜롭고 악한 것에는 미련해야 할 줄로 믿는다.

하나님 없으면 고만고만하게 모여 고생

가인은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로부터 멀어져서 쫒겨나게 되는데,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것은 성을 쌓고 끼리끼리 모여사는 것.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명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몇 사람들끼리 모여 바운더리를 만들고,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가인은 그곳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할 방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대 문명들을 살펴보면 같은 시기에 산 사람들인데도, 각 문명마다 그 발달의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한반도에 살던 고대 사람들이 돌 세 개로 고인돌 쌓고 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이미 피라미드를 올리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 끼리 모여 살고 교류가 없으면 빠른 발전은 없다. 가인이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나름 고군분투 했겠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인도와 보호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다. 고산을 타시는 분들이 그런 말들을 하신다. 산이 사람이 오르도록 허락하는 것이라고. 세상이 그냥 발전하는 것 같지만, 인간이 밝혀 나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밝혀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처음에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라고 말했다. 또 가인과 아벨은 소산을 얻은 것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다. 자식과, 먹을 것, 입을 것에 쓸 것들. 그 당시의 삶을 영유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요소들을 하나님께서 온 것이라 여겼다. 이 모든 것을 풍족하게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공급하심 없이는 결핍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그 은총을 받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벨은 그 은총을 누렸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 말은 가인도 감사를 해서 드렸고, 아벨도 감사를 해서 드렸는데, 감사도 제대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벨처럼 드리는 믿음의 감사는 드리는 것은 내 삶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왔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감사다. 본문이 강조하고 있다 아벨은 “첫” 새끼와 그 “기름” 으로 드렸다. 이 두 단어는 우리에게 말하고자 함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 은총을 받는 감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곁에서 공급하심과 보호를 받는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집 떠나면 고생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떠나라고 해서 떠났으면 좋았을 걸, 가인은 쫒겨나듯 집을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 품을 떠나 살면 고생이다. 우리 인생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우리가 믿음의 감사를 드릴 때에,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채워주실 줄로 믿는다. 하나님 집에서 고생 더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