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사랑하라
2020년 6월 24일

이웃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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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7: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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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4일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잠언 17:16-19

서론

이웃에 대한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보통 그들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The Bible tells us to love our neighbors, and also to love our enemies; probably because generally they are the same people.

G.K. Chesterton

처음 읽었을 때는 웃겼는데, 마냥 웃기지만은 않고, 나름 깊은 통찰이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든다. 결국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우리 인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시고, 찾아와주신 것처럼, 우리도 상황이 어찌됐든 누군가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원수되었던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종류의 이웃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본론

사랑할 줄 아는 이웃

17절에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한다 했다. 여기서 “친구”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주위의 어떤 사람이던지 챙겨주고 보살펴주고 하는 사람들. 자신의 현재 상황과는 관계 없이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되돌려받을만한 것이 없는데도, 얻을 이득이 없는데도, 잘 보여야할 이유도 없는데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나그네를 살피라하신 여호와의 마음 아닐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까이 있는 이웃이 멀리있는 친척이나 가족보다 나음을 동일하게 강조한다. 생각해보면, 이웃이라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상황에 따라 이사를 하게되기 때문에, 이웃을 택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친구를 만들거나, 혹은 원수를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을 수 있지만, 옆집 이웃을 정하시는 것은 어찌보면, 하나님이라고 보는게 더 맞겠다.

개인적으로 밤귀가 너무 밝아서 윗집에 사는 젋은친구들이 밤마다 시끄럽게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여러번 컴플레인을 했다. 참으려고 하지만, 귀마개가 없이는 하루밤도 깨지않고 잠을 못자는 형편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많이 그들을 괴롭히게 된다. 우리 인생에는 이렇게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하신 말씀을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어렵지만 닮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사랑할 줄 아는 이웃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미련한 이웃

두번째로, 18절은 미련한 이웃에 대해 언급한다.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그런 그림을 상상해 보자. 두손 맞잡고, 믿어 달라고, 이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내가 보증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장면 말이다. 단순히 돈 보증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종류의 보증도 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어려움과 곤경에 빠진 이들, 그리고 심지어 나그네와 동물까지 생각해주기를 바라는데, 왜 보증을 해주는 것을 미련한 자라고, 지혜 없는 자라고 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도와주려고 하는 이의 마음은 옳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나, 한가지 어긋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성이나, 능력이나,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의 일을 보장하겠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인간 능력의 밖의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일을 하기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인 것은 예하고, 아닌 것은 아니요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 좋아하시지 않는다. 모르면 하나님께 묻고, 못하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를 원하시지, 마음대로 멋대로 아이성에 올라가서 패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제대로 알고 보증해주실 분은 오로지 예수님 한 분 뿐인줄로 믿는다. 미련한 이웃이 아니라, 지혜로운 이웃들이 되어주시기를 축원한다.

다툼을 좋아하는 이웃

세번째 이웃은 19절에서 보듯이, 다툼을 좋아하는 이웃이다. 다툼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사실 많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은 정상은 아닐 것이고, 피하는게 상책이다. 보통 살면서 다툼을 자주하게 되는 경우는 아마도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굽히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경험하게 된다. 물론 우리 자신이 그런 것도 포함이다. 결국 다툼은 자신의 것이 소중하고,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고, 자신의 판단이 소중하다고 여길 때에 일어난다.

그런데, 가장 바르고, 옳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가정하에,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그러셔도 되지만, 독단적으로만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출애굽 후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이 것들 싹 쓸어버리고 너로부터 다시 이 역사를 다시 시작하자” 모세는 엎드려 하나님을 설득한다. 또 하나님은 반응해 주신다. 그것 뿐인가? 기드온을 부르실 때는 얼마나 그가 양털 가지고 하나님을 괴롭혔는가?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나 같으면 때려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셔도 되지만 그렇게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한낱 인간인 우리가, 내 판단이나 생각이 옳다고 누군가의 것을 누르려고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하반절에는 “자기 문을 높이는 자”가 나온다. 고대의 성문을 생각해보면 도움이 되겠다. 성문을 높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군사력을 과시하고 유리한 위치를 점했기 때문에 지켜내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결과적으로 성벽을 높여서 지켰을 때, 결국 강한 적에 의해 파괴되고, 공격받는 타겟이 될 뿐이다. 자신을 높이는 이런 행위의 진짜 부작용은 상대적으로 낮은 자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 간증들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우리 자식이 1등을 했어요. 어디 합격했어요. 어디 취직했어요. 물론 그랬을 수 있다. 그런데, 2등도 잘 믿는 기독교인이었다면? 학교 떨어진 이도 절실한 기독교였다면? 취직에 실패한 이도 기독교인이었다면? 하나님은 1등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은 아니다. 1등 크리스찬은 하나님의 계획과, 그의 노력과, 기도와, 응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지, 꼴찌 크리스찬이 신앙이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태두리 안에서도 약자의 신앙적 관점을 살피고 배려할 필요가 있다. 툭 까놓고 얘기해서, 다 잘 살고 있지 않고, 그렇다고 그들이 복 못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배워야한다. 나의 것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시고, 낮아지시기를 망설이지 않으셨다. 누르고 높아지기 보다, 낮아질 수 있는 이웃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항상 어렵고 도전이지만, 사랑할 줄 아는 이웃, 예와 아니오를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이웃, 그리고 높아지기 보다 낮아지기를 택하는 이웃이 되야할 줄로 믿는다. 좋은 이웃이 되어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