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을 가져오는 자세들
2020년 7월 22일

응답을 가져오는 자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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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1-10

예배일시

2020년 7월 22일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1-10

서론

흔히 우리가 “자세가 좋다” 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의 자세일수도 있고, 운동을 하는데 폼이 좋다는 말일 수도 있겠고, 배우고자하는 열정을 말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이 자세에 따라서 가르침의 효율이나 결과가 달라지게 된다. 운동을 할 때도, 좋지 않은 자세로 열심히 하면 다치거나, 나쁜 습관이 생길수 있고, 배울 때에 자세가 좋지 않다면, 가르치는 사람도 최선을 다하지 않게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구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본론

기다림과 인내

첫째로, 기다리고 인내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

3절에서 고백한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편에서 몇 번 나오는 구절이다. 기자는 오랫 동안 문제와 함께 씨름해 왔고, 하나님께 간구해 왔으며, 여전히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육체적인 고통일 수도 있고, 환난 가운데 처해있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응답하시지 않자, 자신의 죄 때문에, 단련하시고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도 하고 그렇다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구한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문제 뿐인데, 오랫동안 견디고 기다린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믿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믿음. 하나님이 움직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에 도가 튼 사람은 노아 이길 자가 없을 것 같다. 그 오랜 기간동안 배를 짓는데, 그 기다림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한국사람의 종특상 몇 분 기다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말도 잘 못하는 둘째 딸 이나도, 빨리빨리를 어디서 배워 와가지고 “삐삐, 삐삐” 이러고 있는 판에, 한국 사람이 비를 백년 넘게 어떻게 기다리는가.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가서 갈멜산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시면서,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라고 미리 약속하시고 보내셨다. 그리고 전투가 다 정리되고 엘리야가 아합왕을 보내면서, “큰 비소리가 있나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엎드려 기도하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겠다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엘리야는 비가 오는 소리를 이미 들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기다린다.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기다림과 인내의 자세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 그리고 믿음으로 그 약속을 보고 듣는 것. 그리고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 믿음으로 기다리시고 응답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드리는 삶

둘째,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5절을 보시면,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으니, 날 살려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죽으면 찬양과 감사를 올릴 수 없으니 날 살리시고 찬양 받으시는게 더 유익하시지 않겠느냐는 반협박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라, 우리가 감히 이런 협박을 할 수 있을지. 그의 삶에 하나님께 찬양함과 감사함이 가득해야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죽어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그런데 살아 있는 우리의 삶에 찬양과 감사가 없다면 죽은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런 요구를 할 수 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성경 속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이들은 모두 예외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분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났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삶 속에 가득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위해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계속 해서 살게 하시는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삶으로 찬양과 감사를 드리시고 응답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맞닥뜨릴 용기

셋째, 기자는 문제를 맞닥뜨릴 용기가 있다.

힘겹게 버티고 있고, 언제까지냐고 땡깡도 부리고, 반협박도 하지만, 그는 문제를 직시하고 맞닥뜨린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그가 그렇게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은 그 문제를 묻어놓고 회피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대로 있고, 나의 마음은 그 문제에서 최대한 때어놓는 궁여지책을 택한다. 물론 해결은 그렇게 해서 되지 않는다. 우리는 문제를 직시하고 문제를 향해 오히려 선포해야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고, 받으셨고, 응답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문제를 대할 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원수들은 물러갈 줄로 믿는다.

결론

많은 어려움과 그에 따른 기도들이 있다. 그리고 기도들은 우리에게 항상 기다림을 요구한다.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있어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죽은 자는 찬양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시편기자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죽어 있지 않고 찬양이 될 때에, 우리의 기도는 힘이 있고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수 없다. 탄식, 피곤, 눈물, 근심,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선포하며 그 어두움을 맞닥뜨릴 용기를 갖자. 하나님은 어두움 가운데 빛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원수들은 물러갈 것이다. 이러 삶의 자세들로 모든 기도들이 응답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