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전도여행: 루스드라 [온고지신]
2019년 1월 24일

1차전도여행: 루스드라 [온고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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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8-15

예배일시

2019년 1월 23일

사도행전 14:8-15

  1.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2.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3.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4.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5.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6.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7.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8.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서론

  1. 공자가 논어에서 온고지신이라는 말을 했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배우려고 노력한다.
  2. 우리가 성경을 대함에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했다.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또한 성경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아는 일이다.
  3.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외국에 대해 매체를 통해서만 접해왔다. 할리우드 영화들과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했다. 실제로 그들이 평범하게 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이 다 키도 훤칠하고, 잘생기고 금발이고 그럴 것만 같았지만, 사실 평번한 일상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처럼, 큰 사람 작은 사람, 금방머리 검은머리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다.
  4. 집들도 잔디가 펼쳐져 있고, 한가롭고 아름다운 모습일 것만 같지만, 다 목조 건물이여서 냉난방비 많이 들고, 개미 꼬이고, 잔디 깎는게 귀찮아서 시멘트로 다 매꾸어 버리고 싶다.
  5. 우리가 무엇에 관해 처음 접하게 되면, 그 이미지는 머리 속에 그대로 남아 앞으로의 판단을 계속해서 좌지우지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모든 환경과, 속해서 자라온 문화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본론

1.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기적과 반응

  1.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돌로치려하자, 루스드라라는 곳으로 전도지를 옮긴다. 바울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태어나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가 “듣고” 있었다.
  2. 듣다가 그에게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믿음 있음을 눈으로 봤다.
  3. 일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듣는 것에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믿음은 눈에 띌만한 어떤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눈에 띌 만한 어떤 모습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 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자신의 마음을 만지는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이다.
  4. 평생을 걷지 못하던 그 사람이 말을 들었을 때에, 그의 안에 소망과 희망이 생겨났다는 것으로 유추해 볼 때에, 질병이 고쳐지고, 기적이 나타나는 것들을 바울이 말하고 있었을 듯하다.
  5. 그 생명과 기적의 이야기들을 듣자, 그 안에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생겨, 그의 얼굴 빛이 변하고 바울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6. 그 사람을 향해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라고 외치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다. 많이 들어서 우리가 알고 있지만, 이 기적은 단순히 치료가 아닌, 창조사건이다. 없던 근육이 만들어지는 찰나의 순간이다.
  7. 그 도시의 사람들의 반응이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봐야할 대목이다. 그 기적을 보고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땅에 인간의 모습을 쓰고 내려왔다고 소리지른다.

루스드라 시민들이 가졌던 신에 대한 관점

  1. 오비드라는 고대작가가 있다. 메타모포시스 라는 책에 1세기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전설에 의하면,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브루기아 지방에 왔는데,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반겨 들이지 않았는데, 노부부가 그들을 잘 맞아들여, 그들에게 새 성을 주고, 나머지 반가지 않은 집들을 파괴했다는 전설이다.
  2. 이들이 두 남성이 나타나 이러한 엄청난 창조적인 기적을 행했을 때에, 자연스럽게 살아오면서 들었던 이 전설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3. 내려오는 전통에 의하면, 바울의 외모가 조금 “웃겼다” 고 한다. 머리도 없고, 다리도 조금 휘어져 있고, 눈썹도 일자 눈썹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울이 말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여겼고, 바나바는 아무래도 좀 더 근엄한 제우스의 모습으로 여겼던 듯 하다.
  4. 이들이 반갑게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빨리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을 데려다가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5. 바울과 바나바는 그때까지 외국어로 말하니 아무것도 모른채 아마도 기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응이 긍정적이고 뜨거웠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해 기뻐했을지 모른다.
  6. 그러나 사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는 상황인 것을 눈치채고 놀래고 슬픔으로 인해, 여느 유대인들이 그렇듯이, 옷을 찢고 그 감정을 표출한다.
  7. 이들이 이렇게 반응 한 것은 말씀드렸다시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이 평생 믿어온 종교와, 그들의 생각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지식들이, 자신들이 지금 눈으로 겪은 것을 그런 모습으로 해석하게 만든 것이다.

새 피조물로써 새 일을 행하려면

  1. 비단 이러한 왜곡된, 그리고 사람의 사고를 제한하는, 시야가 이 루스드라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2. 제가 차기훈 청년이 귀국하고나서 모였을 때에, 그런 질문을 했다. “거기서 일년 살면서 깨닫거나 배운 것중에 제일 남는 것이 무엇이냐?”
  3.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사는게 좋은 것 같다” 라는 말을 했다.
  4. 외국에서, 특별히 서양권 나라에서 살아보면, 기훈형제의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보이고, 보이지 않는 차별과 무시가 그 곳에 존재한다.
  5. 가서 장시간 여행이 아닌, 삶을 살아봐야만 그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 것들을 경험한 뒤의 그 장소에 대한 이해는 내가 한 번도 가보기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6. 이탈리아 하면, 로마의 찬란한 문화들과, 찬란한 유산들이 있고, 패션의 일번지이고, 웬지 듣기만 해도 멋지다. 그 화려한 이면들이 우리가 알고 보는 이탈리아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하고 있다.
  7.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믿음의 여정을 시작할 때에, 성경을 읽을 때 받았던 은혜와 감동들, 그리고 내가 터치 받았던 많은 말씀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 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이미 만들어진 시야가 때로는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8. 온고지신이라고 했다. 과거의 것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 보다 미래의 새로운 것을 위해 상고하는데에 의미가 있다.
  9. 그렇다면, 내가 체험한 은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오늘도 행하시는 새 일을 위해 존재해야하고, 말씀 또한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레마로써 새롭게 다가와야 한다.
  10.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도 관성이 존재하는지, 내가 느끼고 겪은 것들에 너무 익숙해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을 방해할 때가 너무 많다.
  11. 성경을 보라, 하나님은 항상 새 일을 행하시고, 그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부르셔서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변함 없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가, 누구에게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가에 따라, 새로운 방법들을 취하셨다.
  12. 무엇보다 결정적인 그 예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는 파격적인 새 일을 행하신데서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 칭하시고, 이제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셨다.
  13.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새” 라는 형용사는 항상 매일 아침마다 되새겨야할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일 아침마다 나를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말씀을 해주시고, 새 일을 행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4. 루스드라인들이 새 일을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교훈삼아 새로운 미래를 향한 신앙을 갖을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한다.

결론

  1.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이미” 나의 지각으로 경험한 하나님이다.
  2. 항상 태초부터 새로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고, “새 것이 되었도다” 하시는 하나님께 “옛 것으로 머물겠다”고 하는 일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많이 본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도 많이 본다.
  3. 과거의 교훈과 현재의 성령님을 통해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일들을 두 눈으로 보고, 또한 누리는 “온고지신” 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