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13-15
-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서론
우리는 눈으로 항상 모든 것을 처음 대한다. 첫 풍경을 만났을 때도 눈이 먼저 보게되고, 사람을 만나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사진으로만 보면 멋들어져 보이는 외국도 막상 그 거리를 걸어보면, 더럽고, 볼품 없고, 깨끗한 서울 생각이 절로 난다. 우리의 눈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주관적이다. 믿을게 못된다는 말이다. 야곱은 형 에서가 가진 것들만 보면서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가진 것이 없게만 보였다. 결국 야곱의 시선이 모든 결과를 낳았다.
본론
욕심이 문제다
성경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큰 틀에서 볼 때 실패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지만,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서 일이 지체되기도 하고, 많은 고난 등을 찾아 온다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전개가 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많은 부분이 야곱과 리브가의 주도적인 행동의 결과로 일어난다.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있고, 야곱을 통해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고, 갖고싶었다. 치마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리브가와 야곱이 한마음으로 저지른 일로 인해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멀리 하란땅까지 도망을 가게되었다.
야곱은 라헬과 그의 아버지이자 외삼촌인 라반을 만난다. 라반은 아내감을 찾으러 온 야곱에게 큰 선물을 기대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여동생 리브가를 찾아왔을 때처럼. 그렇지만 야곱의 형편은 도망자였을 뿐이다.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떼우는 것 밖에 없었다. 대신 7년을 일하고 라헬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하는데, 당시 보통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으로 계산해도 두 배나 더 일해준 것이다. 그것 뿐만 아니라, 삼촌에게 속아 라헬의 언니 레아 또한 아내로 맞아들여 7년을 더 무상으로 일하게 되는 고생을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야곱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많은 자손을 낳고, 점차 부유해졌지만, 그 과정에서 겪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야고보는 욕심에 끌려 시험을 받는 것이고, 욕심은 죄를 낳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시험은 단련과 검증이지, 사탄처럼 “실패”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욕심은 사탄에게 주도권을 내주어 우리가 “실패”하게 한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샬롬을 누리는 것인데,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하고 실패하게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이 이루시는 타이밍을 기다리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는다.
요즘 불안한 이유
우리가 사는 2021년은 물론 몇 천년 전 유목사회가 아니다. 장자권에 탐을 내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가축을 많이 소유하게되는 것이 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돈이나 부동산 그리고 요즘은 주식이나 가상화폐일 것이다. 이 급변하는 사회에 느끼는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계시고 얼마나 적응하고 계신지 잘 모르겠다. 젊은 세대들 2030 세대들은 돈, 부동산은 당연히 없고, 주식과 코인에 대한 지식과 경험도 없고해서, 손을 놓고 있는 경우와 에라 모르겠다 코인이라도 해보자해서 덤비는 두 부류가 있다. 마치 지금 현 사회의 현상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세지는 열심히 성실하게 일만하면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옛 시대에는 몰랐던 정보들에 누구나 접근하게되면서 더 보는게 많아지고, 그래서 더 불안해 지고 있다.
사실 못 보던 것을 보게되는 것이 모든 불안의 시작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중요하게 논의가 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시선이 오랜시간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거기를 보니까 보인다. 우리의 모든 시선을 거기에 빼앗기면 안된다. 우리의 시선이 빼앗겨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분의 인도하시는 삶이다. 세상과 경제를 바라보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영적인 일에 더 우리의 시선을 드려야 한다. 영적으로 결정하고 사는 방식에 시선을 드리는 것이 너무 부족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지, 우리가 통제력을 잃고 무언가를 하게되면, 이미 그 것은 더 이상 유익하지 않다. 언제부터 금과 은의 주인이 경제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나. 날고 기는 투자자들도 하루 아침에 날려버리기도 한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인정하기를 축원한다.
시냇가를 택하자
시편 1편은 시편 전체를 아웃라인하는 중요한 편이다. 악인과 의인의 삶을 분명하게 구분 짓는다. 복있는 의인의 삶의 방식중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은 율법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 맺는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하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다. 휩쓸린다는 말이다. 누가 그렇게 돈 벌었다더라, 누가 그렇게 잘 되었다더라 하면 아무 기준이 없이 그냥 따라간다는 말이다.
의인과 악인의 결정적인 차이를 캐치하셨는가? 삶을 사는데 있어서 결정을 내릴 때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닻이라고 하셨다. 소망의 닻. 닻을 내리면 아무리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닻을 기준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벗어나지 않는 삶이 의인의 삶이고, 시냇가에 심기어 열매 맺는 삶이다. 이리저리 까부끼는 삶이 아니라, 말씀 붙들고, 예수님 따르며,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를 맺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야곱은 항상 형 에서를 바라보면서 살았다. 자신 보다 조금 일찍 태어난 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장자로 인정 받는 것이 부러웠다. 유목민족으로서 형이 가진 사냥 능력도 부러웠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복이 있는데, 그것은 바라보지 않고, 계속 악인의 길을 바라보고 택했다. 그 결과는 죄를 낳고, 실패를 경험 한다.
우리의 눈은 믿을 것이 못된다. 눈에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데 믿으려면 시편의 고백처럼,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시야를 두어야만 한다. 시선을 하나님께 드리고, 의인의 삶을 사시는 시냇가의 나무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