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15-24
-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서론
요즘은 뭐든지 살아남는 것이 삶의 테마가 되어버린 것 같다. 코로나 정국도 그렇고, 언제인가 부터 우리도 티비를 통해 ‘서바이벌,’ ‘경쟁 오디션’ 등의 형태로 살아남는 것들에 많이 익숙해졌다. 사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살아남는 일’ 과 같은 개념은 중요치 않았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복을 주셨지,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싸워서 이겨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담과 하와가 살고 죽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 했다. 하나님은 세상이 악함을 보시고 큰 홍수를 보내시는데, 노아는 은혜를 받아 선택받았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 대로 방주를 지었고, 그의 가족과 동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생존하게 된다. 모두 죽고 이들이 살아남았으니, 생존자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노아는 생존자가 아니다. 그 얘기를 오늘 나누어 보려고 한다.
본론
파괴가 아닌 재창조 / 심판이 아닌 은혜
노아의 방주 사건은 우선 하나님이 무자비한 파괴자로 인식되기 쉬운 장면이다. 수 많은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몰살하는 이 장면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귀여운 그림으로 그리고 이쁜 무지개를 띄워 미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노아의 스토리에서 읽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파괴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창조를 하고 계시다는 것과, 심판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데,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신다., 영은 바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그 장면을 염두해 두시고,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창세기 8:1 에 보시면, 비가 그치고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신다.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읽어내기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아름다운 세상을 파괴하는 것 같니? 아니야, 나 다시 창조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는 물이 줄어들자 노아에게 너와 가족들, 동물들을 다 이끌어내라 명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해라 축복하시는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던 그 장면 그대로를 연출하신다. 이 스토리를 통해 우리가 읽어야할 것은 하나님은 파괴가 아닌 창조를 하셨으며, 심판이 아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노아와 노아 가족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은혜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은 계획은 평안이고 소망을 주시려는 것이지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닌 줄로 믿는다.
노아는 난세의 영웅이 아니다
고대시대에는 성경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기록들에서 방주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바빌론 지역의 기록이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우리가 이런 인류가 멸망하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난세의 영웅 같은 인물이다. 그들의 종교는 다신교였기 때문에, 신들끼리 모의한 이 계획을 주인공은 한 신에게 비밀리에 전해 듣게되고, 배를 짓기에 열중한다. 그것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난리를 친다. 그리고 동물 뿐 아니라, 금은 보화를 싣고, 만발의 준비를 마치고 배의 문을 닫고 들어간다.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이 생존자 영웅은, 결국 신들에게 영생을 허락 받게된다. 그 이유도 조금 웃긴데, 그 신들이 자신들에게 음식을 바치던 인간들이 사라진 걸 후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노아는 난세의 영웅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지으라고 해서, 배를 지었다. 가족들하고 동물들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갔다.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흔히 설교를 하고 할 때, 노아가 사람들에게 설득을 하고 경고를 했다는 내용들을 가르쳤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상상과 추측일 뿐이고, 성경은 그런 것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고대 이야기의 주인공은 문을 닫고 들어갔지만, 노아는 분명히 하나님이 들여 보내시고 직접 문을 닫으신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아는 노아의 이야기는 노아가 주인공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철저히 하나님이 주인공이시다. 주인공이 누구인가는 그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드러낸다.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신다.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요한 일 힘든 일은 내 소관이야. 너가 아니야. 우리의 삶에 위기가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울려 퍼지게 하시기를 축원한다.
노아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한가지 빼고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다. 그런데 노아가 홍수 후 마지막으로 비춰진 모습은 요즘 말로 술에 쩔어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홍수를 겪으면서 생긴 트라우마나 외로움 탓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고치고 넘어가야 하는 이미지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이는 자격은 올바른 삶의 모습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아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힘들면 무너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 고대의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영웅이고, 영생을 얻고, 왕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노아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는 그런 평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 그를 은혜를 받은 자로 만든 것은 단 한가지이다.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서의 위대함은 생존하는 능력이나, 영웅적인 행동, 타고난 신분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데로 순종하고 있으라는 이 말이 너무 수동적이고 힘 없어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믿음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시키시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고보가 말한 죽지 않은 믿음, 행하는 믿음인 것이다.
결론
우리의 삶 속에 무언가가 잘못 되어갈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파괴가 아닌 창조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나는 피조물이다.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창조의 수혜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능동적인 생존자가 아니라, 수동적인 순종자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수동적으로 듣지만, 능동적으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의로운 사람,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생존이 아니라, 귀한 순종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