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전도여행: 구레네섬
2019년 1월 17일

1차 전도여행: 구레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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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4-12

예배일시

2019년 1월 9일

사도행전 13:4-12

  1.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2.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3.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4.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5.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6.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7.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8.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9.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서론

  1. 13장 4절부터는 사도바울의 본격적인 전도여행이 시작된다. 상당히 많은 양의 자료를 놓고 사도행전강해를 준비하고 있는데, 제가 진행하는 강해의 취지는 이렇다. 
  2. 성경을 읽을 때에, 들은 것이 떠올라 말씀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돕게 하기 위함이다. 특히 이 전도여행 부분은 최대한 그 당시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전달해 드려서 개인적으로 읽으실 때에, 말씀이 살아나도록 해드리려고 한다.
  3. 정보전달이 많을 수 있기 때문에, 건조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성경을 더 깊이 알아가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란다. 

본론

안디옥 – 실루기아 – 살라미 – 바보

  1. 이 여행에 대해 배경들을 먼저 설명드리고자 한다.
  2. 안디옥에서 근접한 항구도시인 실루기아로 바나바, 사울, 마가라하는 요한 세 사람이 내려갔다. 이 요한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탈출해서 찾아갔던 집의 여주인의 아들로서 바나바의 친척이다.
  3. 그 곳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향하게 되는데,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루트 선택일지 모른다. 바나바와 요한이 구르로섬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대해 잘 알고, 여행하기에도 수월하고, 인맥들도 있었을 것이다.
  4. 제일 먼저 도착한 동쪽 항구도시 살라미다
  5. 곳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전도지를 각 도시 회당으로 잡았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고백하듯이, 복음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이방인에게임을 그의 전도의 원칙으로 삼은 듯 하다.
  6. 회당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과 고넬료와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모였을 것이다. 그들을 타겟으로 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7. 6절에서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렀다고 했다. 바보는 살라미의 반대쪽 구브로섬 서쪽에 있는 도시로, 그 사이에 많은 도시를 거치면서, 회당전도를 했을 것이다. 
  8. 바보는 당시 수도로 정치적인 중심지이고, 그래서 그곳에 총독 서기오 바울이 있었다. 아마도 서기오 바울은 전도팀이 도시마다 들르며 회당전도를 해 온 소식을 보고를 통해이미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하자 그들과 마주하게 된 듯하다. 
  9. 당시에 로마 정치인들이 점술가나 마술사라 불리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흔했다. 로마 황제 또한 그랬고, 나중에 사도바울과 마주하게 되는 벨릭스 총독도 유대인 마술사를 가까이 했다는 기록이 있다. 
  10. 특히나 유대인 마술사들이 당시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점을 치거나, 앞 일을 보는 등의 마술로 인기가 있었다.
  11. 이 서기오 바울은 본문에서 분명히 언급한 것처럼, 지혜 있는 사람이었다. 여러 로마의 기록들도, 이 가문과 이 사람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혜가 없고, 둔해서 마술에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당시에 지혜자들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자문을 얻는 방법이었고, 마술사들의 능력 또한 무시 못할 것들이었다.
  12. 바예수라는 이 유대인 마술사의 이름은 아람어로 예수의 아들, 즉,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성령의 보내심 따라 처음 나선 선교지에서 예수를 전하면서 맞서는 세력이 이 자인데, 이름의 예수의 아들이며, 거짓 선지자이다. 성경에서 당시 부족한, 제한된 지면에 빽빽히 기록된 사건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자에 대해 이렇게 길게 기록한 것은, 무언가 우리가 읽고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은, 영적인 싸움의 존재이다.
  13.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영적인 싸움이 존재한다. 9절 10절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에 충만하여, 바예수를 향하여, 마귀의 자식이라는 욕설을 퍼붓는다. 
  14. 분명히 누가가 “성령에 충만하여” 라고 언급한 뒤, 마귀의 자식이라는 욕설을 퍼부었다고 기록했다. 예수님도 비슷하게 사용하신 말이지만, 욕설이라 해도 될만큼 엄청 강한 맨트이다. 
  15. 마귀는 우리가 그래서 우리가 항상 강하게 대적한다. 
  16. 11절에 바울이 바예수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울 자신에게 내린 조취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마치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의 모습과 흡사하다.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7. 이 모습을 본 총독 서기오 바울은 보고 믿게 된다.

제외가 아닌 포함의 영성

  1. 몇가지 우리가 배울 교훈들이 있다. 이 후 본문에 나오겠지만, 마가라하는 요한이 이들과 함께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2. 현대 신학에서 이 요한의 회귀를 보는 시각은, 아마도 이방인들의 구원, 특히나 로마관료의 구원을 본 그의 회의적인 시각이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특히 그가 안디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대인교회의 근거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 그 의견에 힘을 더 실어준다. 
  3. 이렇게 유대인들이 당시 기독교를 가장 크게 반대했던 이유는 기독교가 이방인들을 공동체 안에 “포함” 시켰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을 그들만의 하나님으로 만든 것은 그들의 큰 오류다. 그것은 온 세상에 신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팔레스타인 지역의 하나의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5. 우리 기독교가 그런 핍박 속에서도 밖의 것들을 “포함” 시키면서 성장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교회들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제외” 시키는 영성을 키워가고 있다는 점이다. 넌 그러니 안돼, 이건 이러니 안돼. 하나님은 만물의 주님이시다. 이런 것의 하나님도 되시고, 저런 것의 하나님도 되신다. 물론, 교회는 거룩해야하며,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기본 자세는 제외가 아닌 포함의 영성이여야 하겠다.

이기심을 대적하라

  1.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이던 바예수가 전도팀에게 극렬히 반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지를 생각해봐야겠다. 
  2. 그는 정치적 관료의 영적인 자문가로서, 서기오 바울의 마음이 예수에게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의 이기심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진리를 향한 서기오 바울의 호기심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기만을 바랬다. 그래야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3. 이러한 이기심, 자신의 이익을 위한 마음이 보통 사도바울의 전도여행 가운데 만나는 반대세력의 대부분의 이유이다. 
  4. 아까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바예수의 뒤에는 마귀의 영적인 대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향한 발검음에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요소들은 다름아닌, 내 안에 있는 이기심일 가능성이 높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베풀지 못하는 이유, 포용하지 못하는 이유.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 그것들의 배후에는 나의이기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강하게 대적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믿음의 근원은 말씀

  1. 12절은 총독이 믿게되었다고 말한다. 총독이 바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믿었다 라고 결론을 내리면 안된다. “주의 가르치심을 높랍게 여기니라” 라는 하반절에 주목해야하겠다. 놀라운 일은 바예수를 통하여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바예수보다 더 큰 능력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가 믿음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 그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바울의 뒤따른 “가르침,” 말씀 때문이다. 
  2. 순복음교회가 은사를 사모하고 기적들을 체험하는 일에 좀 더 열려 있지만, 말씀을 상고하고 연구하며 공부하는 일에는 조금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기적과 은사들은 믿음의 스파크를 일으키지만, 믿음을 키워가는 것은 하나님의말씀이다. 
  3. 말씀을 사모하고 더 큰 믿음으로 자라나실 수 있기를 축복한다.

결론

  1. 우리의 신앙이 신자의 기준을 세워 제외 시켜가는 것이 아닌, 포함시키고 변화시키는 신앙이 되기를 원한다
  2. 우리 신앙의 큰 적은 내 안의 이기심이다. 예수님 처럼 살기 위해, 내 안에 이기심을 대적하라
  3. 찬양과 기도가 우리의 맡은 바 일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일이 아닌, 생명이되고, 기쁨이 되고, 믿음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말씀으로 매일 매일 믿음을 세우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