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2:24-29
-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서론
“마지막 보루” 라는 말을 종종 쓴다. 모든 자원과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하려 했지만 안되었을 때에, 이 것도 안 통하면 정말 끝이다 싶을 때 꺼내 쓰는 비장의 카드 같은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에게 마지막 보루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혹시 “기도,” “하나님,” 뭐 이런 것 생각하셨으면 틀렸다. 우리에게는 그런게 있으면 안된다. 이유는 곧 알게 되신다.
본론
마지막 보루가 아니다
형 에서가 사백 명을 이끌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상황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를한다. 힘드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야곱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어렵고 힘들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그 방법이 심지어 사기를 치는 일일지라도. 처음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가던 28장에서 야곱의 입에서 기도가 나온 이후로 다시 한번 생명의 위협이 있는 상황이되니 기도가 다시 나온다. 그러면서 조상의 하나님, 약속하신 하나님, 언급하며 거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너무 무섭고 겁이 나니 도우시라고 기도 드린다.
야곱의 기도를 보며 기도에 대한 바른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야곱에게 있어서 기도라는 것은 마지막 보루와 같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기대본다.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기도라는 것은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꺼내야하는 카드가 아니다.
하나님을 아낄 이유가 어디 있는가? 기도찬스를 무슨 예능에서 나오는 전화찬스처럼 평생 2번만 주신 것도 아닌데, 왜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처럼 기도는 범사의 영역에 속해있지, 위기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다. 별 것 아닌 상황에서 기도한다고 하나님 우리에게 “뭘 이런 걸 사소하게 나한테 말하냐”고 하시지 않는다. 청년들과 시편을 묵상을 하다보니 다윗은 이쪽 길로 갈까요 저쪽 길로 갈까요 까지 묻는 것을 보고 “참 어지간하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맞는 것이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기도가 언제나 첫 번째 옵션으로 떠오르셔서 최초이자, 최선이자, 최후의 방법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힘을 빼라
야곱의 기도를 보면 기도에 아직도 자신의 의지와 힘이 들어가 있음을 보게된다. 성경에서 보통 다른 인물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나서 하는 행동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세 전환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위기에서 기도를 드린 야곱이 기도 후에 행한 것은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큰 선물을 해서 형의 마음을 달래고, 식구들을 미리 만나게하고 시간을 끌면서, 에서의 마음이 수그러들기를 바랬다. 자신 나름대로의 전략을 짜고 가장 뒤에서 홀로 남았다. 야곱의 기도는 말 그대로 “도와 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할 건데 도와 주십쇼, 쫌 도와 주십쇼!”
다윗 같았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꼼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항상 응답하신다.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순종과 경청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도에 힘을 빼야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우선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십사 구하는 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와 같은 듣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에서 힘을 빼고, 나의 생각을 빼서,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을 취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새 피조물: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존재
야곱이 나름대로의 작전을 세우고 홀로 남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만난다. 당시 야곱은 100세가 거의 다 된 노인이었다. 야곱과 밤새 씨름을 했다고 했는데,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의 싸움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의 절박함이 그 만큼 강했다. 야곱의 인생을 너무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야곱의 이름의 뜻이 잡는다는 뜻인데, 아직도 그 타고난 기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야곱의 관절을 치신다. 그의 고집을 꺾으시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이제 그의 이름처럼 자신의 힘으로 잡아보려는 노력을 그만 두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신다. “이스라엘” 이라는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겨서 붙혀졌지만, 사실 이스라엘이란 단어 그대로의 뜻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 싸우신다는 뜻이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이것이다. “이제 야곱아 너 힘 좀 빼고 살아라. 내가 싸우겠다.”
기도와 기도응답으로 우리가 얻게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다. 그 자비로 말미암아 내가 아닌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게 되는 것이다. 나의 힘을 빼는 것이다. 야곱처럼 다리가 절게 될지라도 힘이 빠지고, 나의 고집과 계산과 생각이 빠졌을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된다.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의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바울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취해야 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해야한다. 내가 주도적으로 잡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싸우시는 인생,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다. 우리의 기도와 삶에 힘을 빼고,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정체성으로 사셔서 범사에 승리가 있고, 복의 근원들이 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