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시민

서론

  1. 바울과 전도팀과 가이사랴의 제자들 몇명이 예루살렘 교회에 도착해 이튿날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나러 간다.
  2. 바울이 행한 사역들을 보고하자,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뻐한다. 
  3. 그런데 그런 기쁨과 반가움을 뒤로한채 야고보와 장로들은 그들이 직면한 큰 문제에 대해서 바울에게 설명을 하면서 오늘 본문이 이어진다. 

본론

예루살렘의 상황

  1. 사도행전 외에 바울의 서신서들만 읽다보면, 마치 바울이 유대인들과 율법에서 등을 돌린 것만 같이 보일 수 있다. 실제로 기독 역사속에 그런 오해들이 많이 있었다. 
  2. 하지만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쭉 본 것을 되돌아보면, 바울이 전혀 유대교와 율법에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3. 이런 바울에 대한 오해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했다. 
  4. 오늘 본문에서 기쁨을 나누기도 잠시, 야고보와 장로들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오해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만 봐도 그 사태의 심각성을 엿볼 수가 있다.
  5. 본문에서 예루살렘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이 있다고 했는데, 더 이상 바울이 초기에 주도했던 것 처럼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6.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부류로써 인정되고, 오히려 그들이 한 마음으로 로마의 압제를 대항하고 있었다. 열심당들을 나름대로 활동했으며, 기독교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며 경건생활과 구제를 이어갔다.  
  7.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만 보더라도, 야고보와 이 “새로운 도”를 따르는 이들이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높게 평가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초반 부에도 역시 유대인들에게 칭송받는 것을 볼 수 있다. 
  8. 이러한 좋은 평가에 힘입어 수만의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생겨나게 되었다. 
  9. 그런데 문제는 이 신자들의 믿음이 사도들이나 장로들만큼 성숙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방인들에 대한 이해도가 지도자들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10. 바울에 대한 어떠한 음모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에 대한 나쁜 소식이 돌았는데, 바울이 이방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21,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라고 소문이 돈다. 바울이 변절자가 되버렸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바울의 겸손

  1. 지도자들이 “그러면 어찌할꼬?” 바울에게 묻는다. 이 질문은 어쩔 수 없으니 라고 운을 떼면서, 우리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꼭 해야만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면서 바울에게 제안한다. “우리에게 나실인 서원한 네 사람이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정결의식을하고 서원한 사람들을 위하여 비용을 너가 내어서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그 것을 본 사람들이 소문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3. 사실 바울 입장에서 왜 해야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청일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주가 부르신대로 목숨바쳐 전도하고, 가르치고, 고생하고 이제 막 도착한 것 밖에 한 일이 없다. 
  4. 그런데 소문이 생겨나, 바울을 마치 죄인 취급하고 있으니, 억울하고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그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도 조심스럽게 이 말을 하고 있다. 바울에게 25절에서,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들에 대해 결의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우리는 여전히 바울, 너와 한 배에 타고 있다는 말로 안심시킨다. 
  6. 바울은 이 모든 상황을 인정하고 지도자들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튿날 네 사람과 함께 정결의식을 행하러 가는데, 이 정결의식은 일단 바울만 받는 것이다. 유대인이 외부 지역에 갔다가 돌아오면 제사장에게 신고를하고, 총 일주읽간의 정결기간을 갖는데, 삼일 째와 칠일 째에 물로 뿌림을 받아 칠인만에 정결하게 된다. 바울은 네 명의 나실인 서약을 마치는 날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 과정을 시작했고, 나머지 네 명은 7일간의 나실인 서원을 시작하는 것을 신고했다. 
  7. 26절에, “결례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라고 했는데, “만기될 날짜를” 미리 알렸다는 의미로, 아직 그 날이 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8. 바울이 또한 네 명의 비용을 댈 것을 요구했는데, 이 비용도 만만치가 않다. 일년된 양, 일년된 암양, 어린양, 빵, 곡식, 음료까지 가난한 사람이 절대가 감당못할 수준의 예물이 필요로했다. 
  9. 바울이 이 만한 정성과 노력을 들이면서까지 이 일을 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고, 이 일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 한 새 사람

  1. 그렇다면 바울이 이만한 행동을 주저 없이 할 수 있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2. 에베소서 2:13-19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3. “한 새 사람”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새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로 연합된 새로운 인류를 의미한다. 유대인쪽으로의 흡수통합도 아니고, 이방인쪽으로의 흡수연합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인류의 탄생이다. 
  4. 바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한 새 사람이라는 하나님 나라 시민, 하나님의 권속의 정체성은 바울이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게 해주었고 유대인들 또한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들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다. 
  5.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자” 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적이시고, 다양한 모습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시지, 다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기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6. 바울은 그 창조주 하나님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모습대로 주님을 섬길 것을 가르쳤고, 교회의 덕이 되는 한도 내에 항상 자유함을 말했다. 
  7. 우리가 신앙생활을 긴 시간 이어나가다 보면, 고정관념이 생기고, 그 박스 안에 모두를 가두려는 노력을 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8.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정체성 아래 다양성이 인정되고, 분열보다는 연합을 추구하고, 나도 아닌 너도 아닌, 새로운 하나님 새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될 줄로 믿는다. 
  9. 바울은 곳곳을 다니며 고생했지만,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의 부재 속에 예루살렘에 머물며 많은 정치적 문제들을 통해 동일하게 고생을 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된지 얼마되지 않아 62년경 야고보는 대제사장의 정치적 행보로 인해 여러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된다. 
  10.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각자 맡겨진 일들을 하면서 그들은 상호작용한다. 
  11.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한민국의 시민을 넘어 모두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 불러주신 줄로 믿는다.
  12.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 권속들은 
  • 맡겨주신 일에 충성한다. 
  • 모두에게 같은 일을 주신 것이 아님을 안다
  • 한 새 사람으로 연합해 하나니 나라를 위해 일한다.
  1. 한 새 사람으로 연합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시민들 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1. 바울의 신념, 자존심, 열정, 비용,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지향점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됨이다.
  2. 한 새 사람을 이루는 것, 하나의 새로운 시민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울, 야고보, 그리고 초대교회의 목표였음을 보게된다.
  3. 인정교회라는 한 교회로서 나, 너를 넘어서 하나의 새로운 하나님의 시민들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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