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잠언 20:1-8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의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서론
역사상 혼자였던 사람은 없다. 아담도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었으므로 혼자였던 적은 없다. 그것도 보기 좋지 않으시다며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 사람은 애초에 혼자 살도록 디자인되지 않았고, 그렇게 살아도 안되게끔 창조되었다. 온 우주는 상호 의존적으로 작동한다. 해가 있어야 하고 달이 있어야 하고, 중력이 있어야 하고 산소와 수소와 질소와 모든 비율이 정확해야만 생물이 살 수 있는 요건이 만들어 진다. 하나님은 항상 공존과 부분을 넘어 전체의 하모니를 의도하고고 계시고, 그 것을 무너뜨리는 요소들을 제거하신다. 오늘은 이 전체의 하모니, 밸런스의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술 취하고 방탕한 자
본문 전 단락에서 언급하는, 미련한 자들의 타입 중 한가지인 술취하고 방탕한 자들이 1절에서 언급된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고,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 이기에 즐기는 자는 지혜가 없다고 한다. 술을 마셔본 경험, 혹은 지켜본 경험들이 다들 있으실 텐데, 술이라는 것은 마시는 사람 자신에게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 건강을 헤치게 되는 것 말고는 딱히 문제될 것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피해를 보는 것은 타인이고, 주위 사람들이고, 그리고 사회 전체가 손해를 본다.
얼마 전에 술취해서 찻길에 누워서 자던 분이 차에 치여서 돌아가셨는데, 운전자가 무죄 판결을 받게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과, 재판에 휘말리면서 받은 모든 수고와 스트레스는 어떻게 보상 받겠는가? 또한 음주운전 때문에 생명을 잃었다면 그것은 누가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또 가정에서 가족들은 음주를 심하게 하는 가장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는 것 또한 흔한 일이다.
지혜롭다는 것은 똑똑한 것과는 달라서 나의 틀 밖을 볼 수 있는 능력이고 시야이다. 그런 지혜는 기본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데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그 지혜의 비밀을 알게하신다.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평화를 깨는 자
미련한 자들이 왕 앞에 넘겨지는 듯한 그림을 보게된다. 2절과 8절은 왕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또 다른 종류의 미련한자들이 언급된다. 잠언에서 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대사, 대리인들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질서, 이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 발란스를 맞추면서, 유기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완벽하게 돌아가게 만드신 그 원리를 파괴하는 모든 것들을 경계하신다. 그리고 응당한 진노를 표하신다.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다 했는데, 사자가 소리내어 울었다는 것은, 너 내꺼야, 내가 너 먹을거야, 찍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먹이감은 다른 무엇이 절대로 사자로부터 구해낼 수 없다. 그리고 특히 ‘진노’ 라는 단어는 성경에 열대번 나오는데, 가장 익숙한 곳은, 이집트의 군대들이 홍해에서 수장되었을 때, 사용되었다.
왕은 평화를 유지하기 원하지, 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련한 자들은 그러한 평화의 밸런스를 자꾸 무너뜨린다. 다툼이 일어나게 한다. 하나님은 홍해로 덮듯이, 그런 미련한 자들의 삶에 진노를 표하신다. 평화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공동체의 의견을 무시하는 자
4절에는 게으른 자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진다.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면 거둘 때에 먹을 것이 없다. 잠언에는 게으른 것에 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많이 들어있다. 그런데 게으름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놀게하지 않으셨다. 모든 것이 제공되는 곳에 살았지만, 에덴동산을 맡기시고 일하게 하셨다. 그것은 창조 질서의 한 원리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열매를 맺는 것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역시 일하고 계신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 개인이 게으른 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죄이다. 팔레스타인땅은 10월부터 4월까지만 비가 내리는 지역이다. 그 말은 여름 내내 비 없이 굳은 땅은 돌이되기 때문에, 가을에 추수를 다 하고 겨울이 되기 전에 비가 내리면 얼른 땅이 물을 먹었을 때, 땅을 갈아 씨를 뿌려야 한다. 그 때를 놓치면 다음 해에 굶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게으름을 피워서 먹을게 없다고 해보자, 하나님의 율법은 어려운 이를 그냥 내버리는 법이 없는데, 그러면, 그 게으름의 피해는 누가 감당하게 되는가? 고스란히 이웃에게 그 게으름의 결과가 전가가 된다.
성실함이라는 것은 공동체가 개개인에게 요구하는 기본적인 에티켓이고, 기대치다. 한 사람의 게으름은 공동체 전체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만든다. 그 상태는 하나님이 절대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나 하나 절제하고 움직에게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전체를 다루는 것임을 기억하시는 지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자신만의 유익을 도모하는 자
5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에 대해 언급 한다. 여기서 모략은 어떤 긍정적인 의미의 지략 같은 것이 아니고, 감추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역시 우리가 공동체의 관점에서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음모를 꾸미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체가 아닌, “나” 혹은 “이익단체”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음모라는 것은 항상 피냄새 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전체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그 음모를 감추기 위해, 위선을 떨고 숨기고 자신의 인자함을 자랑한다.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온다.
이러한 자들이 맞이할 결과는 8절에서 보듯이, 왕들이 그 모든 미련한 자들을 물리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샬롬의 상태를 거부하고 파괴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반대로 온전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신만 바라보고 위하는 시야에서 벗어나서 공동체에 진실한 친절을 베풀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충성스럽게 받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의인이라 하시고, 복을 베푸신다. 전체를 생각하는 지혜자들, 의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왕은 한가지의 업적으로 평가받지 않고 전체적인 조화를 추구해야 선왕으로 평가받듯이, 하나님의 관심 또한 그렇다. 개인이 개인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왕은 그에게 반하는 반응을 하실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개인의 즐거움 때문에 주변이 힘든 것 기뻐하지 않으신다. 평화를 도모하지 않고 다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공동체가 기대하는 성실함을 보이지 않는 것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자신만의 유익을 도모하는 자 기뻐하지 않으신다. 모두의 이익,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