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제
2020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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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8:19-25

예배일시

2020년 7월 29일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잠언 28:19-25

서론

세상에는 두가지의 새벽형 삶이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인다.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과 새벽에 자는 사람. 물론 직업상 그렇게 생활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이 택한 삶의 패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미국을 가려고 준비하던 때였다. 대학교 등교를 하기 전에 영어학원 새벽반에 다닌 적이 있다. 삼성에 있는 그 어학원에, 그 이른 시간에, 서울 곳곳에서 모인 대충봐도 300명이 넘는 한참 젊은 청년들이 빼곡히 교실을 채우고 앉아서 유명하다는 그 강사 한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새벽에 잤을 때는 몰랐는데, 새벽이 일어나보니 새벽은 생각보다 활기차고, 많은 이들이 이미 깨어 생활하고 있다. 심지어 나만 게으르게 살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여러모양으로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은데, 오늘 본문을 통해 보는 것은 부지런함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고, 다 옳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본론

내가 기반하고 있는 경제구조

꿈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이면서, 무언가 아쉽기도 하고, 두렵기도하고, 희망차기도한 복합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빠짐없이 “너는 꿈이 뭐냐?” 고 묻곤한다. 그러면 여지없이 대부분 어린 아이들은 당시에 유행하는 직업을 외치곤하고, 중학생만 되어도 이제는 모르겠다고 하고, 아예 없다고 하기도 한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꿈이라는건 뭔가 아쉽고, 아이들 입장에서는 막연하고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차이이다.

그렇다치더라도 꿈이라는 것이 주는 밝은 이미지는 어쩔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며 풍요로울 것이고,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할 것이다” 여기서 방탕을 좇는 다는 것은 꿈, 환상, 판타지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꿈을 꾸고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닐진대, 왜 잠언은 꿈을 좇아가면 궁핍해진다고 하는걸까?

우리는 그 당시의 삶의 모습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지금처럼 사회가 고도화되고, 다양한 직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이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기껏해야 농사나 유목을 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경제적 신분이 바뀌는 일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부동산도 함부로 사고 팔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런 사회적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이 꿈을 꾸면서, 오늘 해야할 일을 미룬다면 당연히 궁핍을 당하게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 당시에 맞는 사회구조와 또 경제구조를 계획하시고 이끄시고 계신데, 오늘, 지금의 성실함은 배제하고 막연한 꿈만 가지고 현실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당연히 궁핍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물론 이 본문의 배경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다. 꿈을 꾸는 것이 요구되고, 현실을 극복해야하고, 노력해서, 쟁취해야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잠언의 가르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경제구조는 무엇일까. 요즘에 여러 매체에 존리 라는 분이 나오셔서 경제와 금융에 대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하시는걸 접했다. 언제는 유대인이 13살부터 경제를 가르친다는 말까지 하는 걸 봤는데, 13세에 성인식을 하면 큰 돈을 주어서 그때부터 돈교육을 시킨다고. 그런 가정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또 의심이 많아서 해외 싸이트를 다 뒤져보니, 보편적인 팩트는 아니었다. 저는 매체에서 대놓고 주식을하고 펀드를하라고 하는 거보니, 사실 개인적으로는 느낌이 싸하다.

물론 이것이 21세기 자본주의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우리가 취해야할 삶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뭐가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저도 확신은 없다. 폄훼할 생각도 없다.하지만 확실한 것 한가지는, 하나님은 “토지를 경작”하는 것,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을 성실하게 사용 하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경제활동을 하던지간에, 우리는 삶을 성실함에 기초를 두고 살아야 한다. 먼 곳에 눈을 두고, 방탕한 것을 좇기 보다는 먼저는, 주신 것, 허락하신 것을 경작하고 충성되이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제구조 안에서 사는 것임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환상인가 현실인가

환상과 헛된 꿈을 좇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는가? 오늘 본문에서 여러가지 부작용을 나열하고 있다. 일단은 꿈도 사람을 부지런하게 하기는 한다. 그런데 문제는 빨리 부하게되고 싶은 나머지 정도를 걷지 못한다.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행위, 즉,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공정한 판단을 하지 않게 된다. 사람을 차별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반대로 자기를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선물을 주어 판단이 흐려지게 만든다. 하나님은 공정한 저울추를 많이 강조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적어도 사회안에 불평등이나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아야 하고, 그것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고, 또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줄로 믿는다.

또, 24절은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자에 대해 말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 보다는 정과 연대를 중요시 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모님들이 희생하시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부모가 희생하는 것 보다는, 자식을 올바르게 교육해서, 하나님의 법도에서 떠나지 않게하는 것이다. 행여나 자식이 뭐 좀 해보게 돈 좀 달라고 하시면 열심히 안 살거면 과한 꿈은 꾸지 말라고 말해 주시기 바란다.

이렇게 헛된 꿈으로 부자가 되기에 부지런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다툼을 일으키고 문제를 야기시킨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피고 충성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한다.

무엇을 믿는가가 결정한다

25-26절은 마치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고,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다.” 꿈도 제 멋대로 꾸고 제 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리면, 그것이 자기의 마음을 믿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인도는 언제나 자연스럽다. 억지로 계획하고 짜내고 소설을 쓰지 않아도 마치 1000개의 모든 퍼즐 블락을 맞추시고 단 하나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우리에게 맞추도록 인도하신다. 그 마지막 퍼즐은 어김없이 ‘믿음’ 이라는 퍼즐이다. 자기의 생각을 믿는 사람은 그 자리에 딱 맞는 믿음 퍼즐을 놓을 수 없고, 자기 욕심 퍼즐을 내려놓는데, 끝내 작품이 완성이 안된다. 믿음으로 그 퍼즐은 완성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의도하신 삶, 그리고 하나님의 경제구조 안으로 들어간다. 더이상 나의 헛된 꿈을 좇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경제에 접근하게 된다. 충성과, 성실과, 믿음과, 의지함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부지런함도 나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경제구조가 있는데,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고 누릴 수가 있다. 그런데 헛된 환상을 좇는 자는 거기에 이를 수 없다. 억지로 그 환상을 이루기 위해, 속히 부하고자, 낯을 보아주어 그릇된 판결을 해주고, 재물을 얻기에만 급해서 악한 일을 자꾸 쳐다보고,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며, 부모의 재산을 탐한다. 그런 자들은 다툼만 일으키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이 경제에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고 환상이 아니라, 실제이고, 현실이된다. 우리는 옳은 성실을 행하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들을 성실히 행하고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