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움직이는 간구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느헤미야 1:2-10

서론

최근 뉴스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의사들의 파업문제일 듯하다. 정부 입장에서는 의료시설의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지방의료시설의 부족해결이 문제인 듯하고, 의사들 입장에서는 낮은 의료수가와 앞으로 일어날 경쟁에 따른 수입저하가 관건인 듯 하다. 물론 그들의 젊음과 바꾼 고된 수련과정에 대한 보답은 있어야 하고 이야기를 해볼 가치는 분명해 보이나,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지탄받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정부와 의료계가 협상을 늦추고 현상황에서는 생명을 다루는 일에 집중을 했어야 했는데, 이 시기에 밀어부쳐서 의료계를 몰아 넣는게 정부의 작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한 마찰이 일어나, 국민들이 피혜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나님은 살리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마땅히 그렇게 하라고 부르셨다. 고대시대에는 사람의 존재는 노동력일 뿐이었다. 지배세력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을 이용했기 때문에, 인간의 지위는 소나 말과 다를게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신’이라 ‘신의 아들’ 이라 칭해주셨다. 그리고 남녀노소, 고아, 과부, 나그네, 동물 가릴 것 없이 사랑하라 하셨다. 그 하나님의 정신이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에도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어떤 집단의 이익이나 가치보다 생명은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기에 속히 이 사태가 해결되기를 기도합니다.

본론

사람 때문에 슬퍼하라

이스라엘은 일찍이 앗수르에 멸망하고, 유다 또한 앗수르를 정복한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다. 힘든 포로생활을 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바사를 통해 바벨론을 무너뜨리시고, 고레스왕을 통해 1차로 유대인들이 고국땅으로 돌아왔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하는데 성공했으나, 유대인을 향한 적개감과 견재가 얼마나 컸는지, 성벽을 쌓지 못하고 거의 80년이 흘러버린다. 2차로 에스라의 인도 하에 2차 귀환을 하게되고 인적, 물적 지원이 되면서 조금 상황이 호전된다.
하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의 삶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바사의 수산궁에서 관직을 하고 있는 느헤미야에게 유대땅으로부터 형제가 하나 도착한다. 느헤미야는 그에게 포로로 잡혀오지 않았던 이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묻는다. 포로로 잡아올 당시에 쓸만한 사람들은 다 잡아오고, 비천한 사람들만 남았다는 것을 감안해볼 때에, 그들은 몇 세대에 걸쳐서 지속되어 온 가난과 핍박에 시달렸을 것이다. 귀환이 일어난 이후에도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지 않았음을 알게된다.

느헤미야가 형제에게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 들의 형편을 물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방땅에서 살아온지가 백오십년은 족히 되었고, 대국의 궁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과 성에 대한 마음을 넘어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의 형편에 관심이 있다. 긴 세월 동안 그러한 사고가 가능하게 교육한 유대인들의 정신 또한 놀랍다. 왜 그게 가능했을까? 그들은 말씀을 놓지 않았다. 이방땅에서도 물가에 모여 안식일마다 말씀을 대하고, 가정에서 부모는 말씀을 가르쳤다. 말씀을 통해서 대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그 어떤 것보다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안식일의 정신은 어떤 생명이든 가릴 것 없이 살리는 정신이다. 또 희년의 정신, 도피성의 정신은 어떠한가?

말씀을 가까이 할 수록 우리는 생명과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어떤 상황이나 믿는 가치를 떠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이 생명존중의 정신을 배워야할 줄로 믿는다. 느헤미야는 사람 때문에 슬퍼했다.

슬플 때 해야하는 일

슬픈 일이 있을 때에 우리가 하는 일은 각자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은 울거나, 기도하거나, 울면서 기도하거나, 셋 중 하나일 것 같다. 이 분야에 있어서는 성경에 꽤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전문일 것 같다. 아들을 낳지 못하던 한나는 성전에 올라가 슬퍼하며 이렇게 기도한다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기도할 때에, 그가 한 것은 하나님의 기억하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당연히 기억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 기억하십시오’ 라고 구하게 하시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되려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하신다.

느헤미야의 간구도 마찬가지다. 슬픔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기도와 금식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한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기억하옵소서” 우리가 슬픈 일을 겪을 때에 해야할 일은 명확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기억해내야만 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간구

느헤미야는 그의 간구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왕의 술관원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지위를 통해 포로 3차 귀환이 일어나게 하신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가라앉는 상황에 처하게되면, 기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상황과 환경과 감정 자체에 침몰당하기 쉽다.

다윗이 위기의 순간에 많은 기도를 남겼는데,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한다. 문제는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해결된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상황과 환경이 아닌, 사람, 생명을 생각할 때에 해결된다.
우리에게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다. 하나님을 움직이려면 우리의 간구가, 느헤미야의 간구처럼, 사람을 생각하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여야할 줄로 믿는다.

결론

슬픈 일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에 우리는 기도를 한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고, 하나님이 움직이시게 하려면 우리가 맞닥들인 문제나 환경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슬퍼하라. 나의 개인적 문제라면, 한나처럼 나의 심령을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다. 슬플 때는 우리를 구속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며 간구하자. 그 믿음 보시고 응답하여 주실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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