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화를 내실까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훔 1:1-7

서론

명심보감에서는 ‘분노’ 그치기를 불 끄듯이 하라고 했다. 불은 순식간에 큰 불이 되고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기에 작은 불씨 일 때 얼른 덮어 꺼버려야 한다. 분노, 화라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분노를 제어하지 못했을 때에, 더 큰 화를 당하기 전에 제어하라는 지혜의 말일 것이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화 내기를 더디하신다고 했다. 성경에 꽤나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의 속성인데, 성경을 통해 보는 하나님은 화를 많이 내시고 심판도 많이 하시는 것 같아 보인다. 하나님은 왜 화를 내실까? 그 물음에 답을 해보고자 한다.

본론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경우

화를 내는 이유는 다양하겠으나, 원론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내 마음대로 안되서’ 가 아닐까 한다. 집에 아이들을 보면, 자기 능력으로 안될 때도 화를 내고, 원하는 걸 안해 줄 때도 화를 낸다. 하지만 어른인 저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내가 행동하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 내 마음대로 아이들이 안될 때 화를 낸다. 결국 ‘화’ 라는 것은 타인을 배제한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의 추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화를 내실까? 우리와 비슷하실까? 하나님 마음대로 되지 않으실 때에 화를 내실까? 오늘 본문 3절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이 나온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우리 스스로 얼마나 우리가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지 잘 알고 있다. 그것만 보더라도 이 문장은 참인게 분명하다. 그렇게 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분노를 맹렬하게 표출하시는 것이 성경에 일관되게 기록되어져있다. 가만히 화 내실 때를 뒤돌아 보면,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경우는, 창조주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인정하지 않을 때이다. 최초의 죄는 선악과 사건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를 무시했다. 다 먹어도 되는데 딱 한가지 먹지 말라한 것을 먹었다. 가인 또한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없애버렸다.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노하시는 것은 우상숭배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우상숭배에 대해 지적하실 때에 항상 하시는 말씀은, 그것들은 그저 나무조각 돌조각들이 아니냐, 그건 내가 창조한 창조물들이 아니겠느냐 라고 말씀하신다.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에게 하시고 계신 것처럼, 또 한가지를 많은 선지서를 통해서 본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을 향해 화를 내실 때는, 그들의 잔혹함과, 파괴함을 지적하시는데, 그 또한 만드신 모든 창조물을 파괴하는데에 대한 분노이시고, 그리고 특별히 본문 2절에서 보는 것처럼,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악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은 ‘질투’를 느끼시며, 보복을 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 질투는, 직접 창조하시고, 부르시고, 소유 삼으신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애착이시고, 사랑이신데, 이방 민족들의 폭력 또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부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묘사되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보듯이 하나님은 창조하신 땅과 바다와 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세계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보게된다. 하나님은 이렇게 창조주로서 온전히 인정되지 않을실 때에, 혹은 그 아름다운 질서가 파괴될 때에, 움직이신다. 

현재 너, 나 가릴 것 없이, 전세계가 고통 중에 있다. 이것이 사탄의 공격인지, 하나님의 진노하심인지는 제가 알 수 없으나,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끝 없는 욕심을 부리고, 자연 앞에 겸손하지 못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이시며 자신이 만드신 창조질서를 소중히 생각하신다. 우리를 포함해서.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환경과 내 주변 이웃을 아끼는 것을 배워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화를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 화를 표출하시고, 큰 분노로 심판하시는 것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점이 있는데, 하나님의 분노가 우리가 늘 하는 그 분노같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화를 낼 때를 생각해보면 알지만, 화라는건 일단 내버리면 그때부터 심장박동이 올라가고, 감정이 섞이고, 깊은 곳에 있었던 것 까지 다 끄집어내게된다. 원래는 맘에 안드는 A라는 것에 대해 단순히 지적하고 싶었는데, B도 끄집어내고, C도 끄집어내서 나도 모르게 감당할 수 없게 감정에 사로잡혀서 감정 배출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험들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도 마치 그럴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2절에서 “진노를 품으시며” 라는 말이 나온다. 영어로는 “진노로 가득찼다” 정도로 표현했는데, 원뜻을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진노를 마스터 하셨다. 그 말은 즉슨, 하나님은 우리처럼 감정에 사로잡혀서 쏟아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조차 원하시는 의도대로 방법대로 제어하신다는 말이다. 작은 아이에게 화를 낼 때, 나의 감정 섞지 않고, 분위기만 잡아도, 아이는 겁을 먹게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시기 때문에, 심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고, 새로운 약속을 하시고, 항상 남은 자들을 선택하시고 예비하신다.

하나님의 화에 대비하는 자세

그렇다면 누가 남을 수 있고, 누가 선택받을 수 있는 것일까. 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집에서 한 아이를 혼내면, 다른 아이는 표정이 바뀌어서, 알아서 똑바로 행동하고 괜히 애교를 부린다. 그것도 나름 집 안에 심판자인 아빠에게 피하는 방법일 것이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허망한 것을 믿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자연을 아끼며,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혼자 남은 것 같다고, 이제 어떻게 해야하냐고 말하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기시겠다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 바알은 풍요의 신이었다. 잘 먹고 잘사는 이들이 앞장서서 섬기던 신이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을 믿었을리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삶의 잘되고 안됨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겸손이고,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피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하나님은 왜 화를 내실까? 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시작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화를 내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화는 감정배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시고 회복시키시는 방편이며, 흔들림 없이 그 목적을 이루신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하는 줄로 믿는다. 무엇을 하던지, 누구를 대하던지,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동을 해야할 줄로 믿는다. 이 어지러운 시국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함으로 산성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로 피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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