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10-14
-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서론
그렇게나 수십년을 기다리던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떠나갔다.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유일한 독자 이삭을 통해 유업을 이을 일만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아브라함을 시험을 하신다. 이 정도 확인하고, 검증하고, 기다렸으면 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들지만,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시험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셨다. 아브라함에게도 마지막으로 확인하시던 이 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본론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시험을 하시려고 “아브라함아” 부르신다.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을 한다. 성경에서 여러차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인물들이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사무엘도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듣지 못하다가, 자신 스스로 “여기 있나이다” 라는 대답을 한 후에야 하나님의 음성이 또렷히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알아들을 수 있고, 또한 준비되어 있어서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평생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렸기에 그의 귀는 하나님께 열려있고, 항상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의 귀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고, 들을 수 있으며,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응답할 수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시험은 진짜를 드러낸다
시험이라는 것은 항상 진짜를 드러낸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거두어 내어 진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드러나게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순종을 하는 것을 아셨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아셨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진짜 한가지를 알기 원하셨는데, 그것은 “포기”다.
분명히 ‘이삭’은 하나님이 주셨다. 100살에 주셨으니, 사람이 절대로 스스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달라고 하셨을 때에, 돌려드릴 수 있는가. 자기 손에 들어온 모든 것들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나의 소유권을 포기할 수 있는가. 이 ‘포기’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시험이다.
창세기 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로 보더라도,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산으로 가서, 종을 머물러 있게 한 뒤, 이삭에게 나무를 짊어지게 하고, 칼을 들고 아무말 없이 산을 오르는 부자의 장면은 정말 문학적이기도 하고, 감정적이기도한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이삭도 나무를 짊어지고 산을 오를만큼 장성했고, 눈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무를 등에 짊어졌다. 랍비들은 이 장면을 형벌을 받는 십자가에 비유했다. 이삭은 그 순간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을 주신 하나님 앞에 다시 돌려드리는 포기자로서 산을 올랐다. 마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이 유업을 이을 자로 주신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산을 오르며 침묵 속에서 끝 없이 하나님께 되물었을 수도 있다. 순종하셨지만, 괴로워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수십년을 기다려 손에 넣은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다시 놓을 수 있는 포기자로 모리아 산을 올랐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볼 시간이다. 나는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 있나. 내가 나를 태울 나무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를 수 있는 “포기”의 신앙을 갖고 있을까. 내가 나의 평생에 걸쳐 얻은 것을 내놓으라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포기”의 신앙을 갖고 있을까. “포기”는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중심이고 진짜 가치이다. 주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와, 주께 돌아감을 인정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표현된 순종
그렇게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신앙을 보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때야 비로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라고 인정하신다. 우리가 알기에,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그런 선택을 할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의 행동을 보기 원하셨다.
지식과 경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우리가 아무리 유튜브에서 집 짓는 영상을 봤다고 해도 집을 절대로 쉽게 지을 수 없고, 그런 거창한게 아니더라도, 빵 굽는 방법을 보고 따라해도, 그 모양이 안나온다. 경험을 계속적으로 해서 경험치가 쌓여야 비슷해져가고 시간이 단축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아시는 것과,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해드리는 것을 경험하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다.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지만, 드려지니까 기쁘게 받아지는 것이지,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고 표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무슨 기쁨이 되겠는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은 하나님께 기쁨이되고, 하나님은 “이레”의 하나님으로 제물을 예비하여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멈추고, 나의 포기를 표현해야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기쁘게 우리의 마음의 표현을 받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더 넘치게 채워 주신다. 포기와 순종을 표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은 그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삶을 살고 있었고,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익히들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없었으면, 이 무익한 종들이 무슨 생명을 논할 수 있었겠는가? 이삭 등에 이어진 나무를 생각해 본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나의 삶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기에 나의 모든 것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위해 주신 생명에 감사함에 머물지 않고, 순종과 포기로 표현되는 신앙으로 더 큰 것으로 더 온전한 것으로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