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31-34
-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서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아내, 리브가를 찾아주었다. 그런데 리브가 또한 이삭의 어머니 사라처럼 순조롭게 임신과 출산을 하지 못했다. 이삭은 성경에서 상당히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이 문제만큼은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리브가가 드디어 임신을 하게되었다.
그런데, 순조롭지는 않았다. 쌍둥이를 임신하게되었는데, (지금처럼, 산모가 쌍둥이인지를 알 길이 없다) 리브가는 임신한 상태가 너무 괴로워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두 아이가 뱃 속에 있다는 것을 알리시고, 그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언급하신다.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섬기게 될 것이다.” 뱃 속에서 그런 것처럼, 두 아이는 성장하면서 계속 라이벌의 관계로 자라난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보는 해프닝이 일어나게된다.
본론
장자의 특권
에서가 먼저 조금 먼저 태어나게되어, 장자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야 장자의 의미가 크지 않지만, 당시에는 장자는 유산의 두 몫을 받았다. 유산을 받을 아들이 두 명이라면, 3분을 해서, 2/3는 장자가 갖게되니, 66%를 장자가 갖게되는 셈이다. 야곱은 둘째로 태어나 생활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에서에 대한 불만 뿐만 아니라, 유산에 대한 욕심도 났었던 것 같다.
에서가 사냥 후에 돌아와 목이 마르고 배고플 것을 아는 야곱은 죽을 쑤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는 판단력이 떨어져 있는 틈을 타, 장자권을 주면 음식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야곱이 이 딜을 통해 얻은 것은 “형”이라는 지휘가 아닌 유산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에도 에서는 계속 ‘형’의 지위를 유지한다. 아직 아버지 이삭이 죽지 않았고, 손에 쥐지 않았기 때문에, 유산을 떡과 죽 한 그릇에 빼앗아간 야곱에 대한 마음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구두 맹세에 대한 중함이 현대 사회와는 달랐기 때문에, 모든 갈등이 이 문제에서 시작되게 된다.
주신 것에 대한 자세
이렇게 에서가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기 보다는 오늘 본문 끝에 34절에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라는 결론이 결정적인 문제이다. “가볍게 여겼다”는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은 같은 단어가 쓰인 다윗의 밧세바 사건을 들여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고 영웅이었다. 그런 이가 한 여자를 취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다른 남자의 여인이었고, 그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이었다. 다윗이 지은 죄는, 하나님의 명을 어김으로서 하나님을 경히 여긴 것이었다.
에서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잘못한 점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하나님이 장자에게 허락하신 것을 가볍게 여김으로 하나님 자체를 가볍게 여긴 것이다. 에서가 물론 눈 앞에 있는 음식 때문에,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그런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동일하게 우리를 괴롭힌다.
히브리서는 이 에서의 모습을 들어 가르침을 준다. 히브리서 12:16-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이고, 들어닥친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 눈 앞에 보이는 핍박을 피하기 위해, 예비되어 있는 큰 축복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 문제는 항상 동일하게 적용된다. 눈 앞에 이익을 위해, 눈 앞에 놓인 편의를 위해 영원한 복을 포기한다. 그런데, 그건 생각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심각한 일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가까운 팥죽에 놓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영원한 가치에, 영원한 축복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또한, 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예정론에 대한 토론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골 구절이다. 로마서 9:10-1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구절을 대하면, 에서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을 받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우리는 그 기준에 대해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택한 기준 또한, 온전한 인물, 완벽한 사람, 선한 성품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실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그러한 야곱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에, 우리 또한 부르시고 사용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게된다. 걱정하지 마시라. 하나님은 우리르 택하여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결론
에서는 하나님이 부르심과 허락하신 복을 가볍게 여김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일에 실패했다. 눈 앞의 유익과 기쁨 보지 말고 멀리보면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하나님을 존중하며 사시기를 축원한다. 나의 연약함이나 탁월함 때문에, 사용 받고, 사용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셨으니, 나를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존중과 확신으로 허락하신 복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