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벨릭스 총독이 가이사랴에 발생한 이방인들과 유대인 사이에 유혈 사태로 인해 해임되고, 베스도가 자리를 이어 받았다.
- 정신 없는 정치적 변화의 시기에 유대인들을 이 틈을 노려 바울을 다시 한 번 해하려는 계획을 세워 베스도에게 접근하게 된다.
- 유대 지도자들이 얼마나 정치세력에 가까웠는지는 그들이 높은 자들의 주변에 지속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 오늘은 유대지도자들과 바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신앙, 순리를 따르는 신앙에 대해 나누어 보고자 한다.
본론
베스도와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호의
- 먼저 우리가 “호의”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 전 장 24장의 끝절부터 오늘 본문 12절까지 “호의”라는 단어가 3번 등장한다.
- 해임당하는 위치에서 전 총독 벨릭스는 유대인들이 로마로 올라와서 고발하는 것을 두려워해, 마지막 할 수 있는 호의를 베푸는데, 그것이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떠나가는 것이었다.
- 그렇게 벨릭스가 떠나가고 베스도가 부임해서 3일만에 지역에 대해 알기 위해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 그 곳에서 유대지도자들이 바울을 고소하면서, 자신들에게 “호의” 베풀어 줄 것을 청하는데, 바울을 가이사랴가 아닌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중간에 해하려는 음모였다.
- 유대지도자들은 베스도가 처음 부임해서 자신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어느정도 꽤뚤어보고 그런 “호의”를 부탁한 것이다.
-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8일에서 10일 머물면서, 실정을 살피고 다시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유대지도자들은 따라 내려와 바울을 그곳에서 고발하는데, 그 재판을 통해 역시, 2년 전에 벨릭스와의 재판에서 그랬듯이 쓸만한 증거들을 보이지 못하고, 설득력도 없는 고로 바울을 능히 이기지 못한다.
- 그런데 문제는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호의와 같은 단어이다) 바울에게 살짝 떠본다. 저들의 바램처럼 예루살렘에 너가 올라가기를 원하느냐?
- 이 “호의”라는 것이 지금 정치와 종교가 만나는 이 장소에서 불순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본다. 이 호의 라고 하는 영어에서 favor 라고 하는 이 단어는 보통 하나님의 은총을 일컫을 때 사용한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에게 이 favor 를 베푸신다. 특히 믿음 있는 자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행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 그런데 유대지도자들을 보라. 누구보다 성전에 거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정의를 거스르고 사람인 베스도의 호의를 구할 뿐이다.
-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할 줄로 믿는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할 줄로 믿는다.
바울이 택한 순리
- 바울은 가이사랴에 구류된지 이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사회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벨릭스도 물러났다. 석방되었어야 마땅한 상황이고, 2년 만에 다시 새로운 총독과 새로운 재판을 가졌는데, 역시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 그런데, 베스도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 것을 본 바울은 더 이상 유대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자유의 신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 바울은 베스도의 함정과도 같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겠느냐”는 질문에 “재판을 내가 당연히 받겠고, 죄를 지었으면 죄값도 받겠으나, 나는 예루살렘이 아닌 로마에가서 재판을 받겠다” 라고 상소하게 된다.
- 사실 바울이 재판을 받는 문제는 로마제국 입장에서 볼 때는 로마에까지 상소할만한 중대 범죄는 아니다. 변방 유난한 한 나라의 종교분쟁일 뿐이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왕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 피고로써 더 부담이 될텐데도 그 길을 선택한다.
- 그렇지만 어찌보면 바울은 로마시민으로써 찾아야할 권리를 찾았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나 상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주고 받는 호의 속에서 희생되지 않고, 조금은 이상한 방법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로마에갈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 방법을 택했다.
- 바울을 선택과 행동을 보면, 유대지도자들의 그 것과는 참 많이 다름을 본다. 벨릭스는 돈을 원했었다. 사실 사람들과 단절시키지 않았던 구류 방침상, 바울이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면, 사방의 교회에 기별해 돈을 써 풀려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벨릭스라면 충분히 석방시켜주었을 것이다.
-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에게 호의를 얻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바랬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노력했다.
- 사도행전 5:29 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며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하나님이 명하신 일 “로마에 가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벨릭스와 베스도에게 잘 보이는 것 보다 마땅한 일임을 바울은 알았다.
-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은총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한다.
순리의 하나님
- 바울의 선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보통 순리에 따르는 일이다. 정도를 가는 것이다.
-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온 우주의 법칙과 규칙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것들에 맞게 모든 것들을 운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누구보다 질서의 전문가이시다.
-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질서 없이 개입하신다고 생각하시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하나 행하시기 위해서도, 한 사람을 부르시고, 응답을 기다려 주시고, 행함을 보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기적을 풀어놓으셨다.
- 심지어 예언이나 방언을 함에 있어서도 질서있고, 품위 있게 하라 바울을 통해 가르치셨다.
- 그것들 뿐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그냥 개입하셔서 구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람이 되어 죽으시기 까지 질서있게 행하셨다. 인간 세계의 순리에 맞게 행하셨다.
-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그 정신을 망각할 때가 있는 것같다. 때로는 너무 목표지향적으로 살아서인지, 내가 맡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과정 가운데 정의와 의는 저버리고, 성공적인 결과만을 위해 애쓸 때가 참 많다.
-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결과를 위해, 과정 또한 순리에 맞게 품위 있고, 손해를 보더라도, 피해를 보더라도 합당한 과정을 통과할 줄 아는 신앙인들이 되어야할 줄로 믿는다.
결론
-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호의에 의존해 살아가지 않는다. 물론 호의는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인 요소들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궁극적인 호의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일 것이다.
-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에게 호의를 얻는 것처럼 잘보이는 것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을 증명하는 나의 생활,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 따른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예수님과 바울이 순리대로 살아간 것처럼 합당한 과정을 통해 아름답고 숭고한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내는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