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21-23
-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왜 에서만 축복하려 했는가
에서와 야곱이 성장하고, 이삭은 나이가 많았다. 이삭은 아들 에서를 불러 요즘 말로 치면, “내가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외식도 좀 하면서, 너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구약에서 자식들을 축복하는 장면을 떠올리시면 아시겠지만, 축복은 모든 자식들을 불러서 한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만 불러서 하려고 하고 있다. 전 장 26장 끝부분에 언급이 되지만, 에서는 가나안땅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삭의 축복기도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축복하고 재산을 주어 집을 떠나가게 했던 것과 흡사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야곱과 리브가의 욕심
리브가와 야곱은 그 에서의 마지막 축복의 기도의 순간에도 그것을 놓치지 싫었다. 물론 에서는 장자권에 대해 상관치 않았고, 이삭은 판단과 오감이 무뎌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리브가가 저주는 자신이 받겠다고 말한 것처럼 야곱과 리브가는 상응하는 댓가를 치룬다. 에서가 집을 떠나가는 것이 원래 이삭의 계획이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에는 야곱이 에서를 피해 집을 떠나가게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야곱은 그 댓가로 험난한 수십년을 살게 된다. 아실지 모르겠는데, 사실 이삭은 야곱이 돌아오고, 아들들을 다 낳고, 요셉이 종으로 팔리기 십 여년 전까지도 생존했다. 계속 같이 지냈다. 아버지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아내 라헬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긴 시간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고,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그렇게 고생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욕심이 죄가 되고 사망이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는 기억해야하고, 복만을 맹목적으로 좇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복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삶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사시는 아름다운 한 주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