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1-3
-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서론
잘 아시는 간디 선생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지구는 모든 인류의 필요를 만족시킬 만큼 공급하지만, 모든 이들의 욕심을 채울만큼은 아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이 지구는 수십억 인구들을 먹여살릴만큼의 충분한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더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쏠리다보니 빈곤이 존재한다. 사람에게는 더 해보고자하는, 더 가지고자하는 본성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나가게되면서 인간의 그 갈망은 더욱 커진 것 같다. 오늘 본문에서는 욕심이 그들의 상태를 또 좋지않은 국면으로 이끌어가게되는 것을 보게된다.
본론
경계를 넘지 말라
오늘 본문은 접하실 때마다 이해하기 쉽지않은 구절이셨을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렇다. 연구를 많이할 수록 복잡해지는 구절일 수 밖에 없다. 가장 쟁점은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대체 누구냐는 문제다. 기독교 초기에 전통적으로는 천사들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았고, 중세에 어거스틴 때는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 주신 아들인 셋족속 아들들로 보고, 사람의 딸들을 가인족속의 딸들로 보는 견해도 있었고,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단순히 지배계층으로 보기도 한다.
사실 이런것들은 인간들의 추측일 뿐이기 때문에 따지면 어려우니까 됐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누구가 되었든간에, 2절에서 보는 것처럼, “보고, 좋아보여서, 취했다”는 것이다.
어디서 본 익숙한 패턴이다. 하와가 한 행동이다. “본즉 좋아보이는 나무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었더라” 하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기서 하고 있는 잘못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죄라는 것이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는 이미지를 내포한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에,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에서 벗어나는 일에 얼마나 진지하게 반응하시는지를 알 수가 있다.
침묵도 동의다
오늘 본문으로 보건데, 욕심의 문제가 비단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내미는 하와에게 저항 없이 용인한다. 사람들의 딸들은 어떠한가? 동의한다. 딸들의 부모들은 결혼을 승낙했을 것이다. 침묵도 동의라는 것을 기억하자. 욕심도 죄지만, 침묵해주는 것도 죄이다. 결국 아담, 딸들, 부모들, 인류 모두가 그 죄의 댓가를 치렀다.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 내린 결단은, 사람들에게서 영을 거두신다.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전통적인 견해를 따라서, 천사들이라고 가정하면, 어쩌면 사람의 딸들이 욕심을 낸 것은 잃어버린 “생명 나무”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하나님만이 관장하실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욕심을 천사들을 통해 부렸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권한을 욕심 부린다.
욕심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할 수 있게하는 에너지원일 때가 많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비춰지게되고, 그렇기 때문에, “괜찮아” 하면서 넘기게 되는 핑계거리를 만들어 준다. 우리는 과녁에 벗어나는 화살을 쏘아서는 안된다. 욕심이 자라나게 해서 죄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옆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묵인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 머무는 노력을 해야할 줄로 믿는다.
삶을 제한 받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법
그래서 이제 인간이 당면한 문제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령이 되도록 숨을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영, 에스겔 37:14 에서도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영은 제한 받았으니 인간의 생명에 문제가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는 생명의 영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성령님 우리에게 오시면, 충만하게 임하시면 일어나는 일은 삶이 살아나는 것이다. 삶에 존재하던 제한들이 거두어 지는 것이다. 비단 창세기에서 말하는 영생을 지금 당장 누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삶의 회복과 살아나는 힘이 거기에 있다. 우리가 욕심을 다스리고, 침묵하지 않으며, 과녁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의 영생을 소망하고 있다. 성령님과 함께 미리 그 영생을 맛보면서, 영원한 그 맛을 소망하시기를 축원한다.
이렇게 우리 속에서 욕심과 성령님은 반대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개념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모든 인간적인 의지와, 뜻을 내려놓고, 자신의 몸을 내려놓으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안에 충만하게 임하신 성령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시고 회복의 영이시다. 우리가 살아나려면, 회복하려면,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을 앞서가지는 않는지, 정하신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지 살펴야 하겠다. 생명을 주시고,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의 결과는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죽은 것을 살리시고, 마른 것을 적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다. 성령이 계시는 나의 삶은 영생을 맛보는 삶이다. 마트에 가면 시식코너가 있다. 아이스크림집에 가면 미리 맛보기가 있다. 아주 조금 준다. 맛보기 스푼은 신생아용처럼 작다. 그런데, 조금 먹어서 맛있다. 성령님 때문에 맛보는 천국 맛이 그렇게 맛있어서, 그 곳을 소망하게 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욕심을 버리고 성령님으로 가득 채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