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앞에 서는 지혜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잠언 22:17-21

서론

우리가 글을 읽고나면 종종 감동이 있고, 공감이되는 글들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글도 적고, 다시 보고, 읊어보지 않으면,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 때의 느낌만 남을 뿐, 글귀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인용조차할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전에 가봤던 칼국수 집에서 한 끼 먹어볼려고 인터넷에서 리뷰를 찾아봤다. 최근에 올라온 글들이 이런 것들이 눈에 띄였다. “맛이 변했다. 예전에는 멀리서 일부러 찾아갔는데, 이제 안 갈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가서 먹었더니, 변한 것은 모르겠고, 괜찮았다. 왜냐하면, 겨우 두 번째 먹어보는 것 이었기 때문에 원래 맛을 잘 몰랐던 것이다.

반면에, 최근에 광진구에 있는 오래된 식당 두 군데에서 맛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먹어보자 마자 주방을 돌아 봤는데, 주인장이 사라졌다. 수 없이 먹어본 그 음식은 한 입 먹고 대번에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내 몸에 그 맛이 완전히 입력이 된 것이다. 내 안에 머물고 있는 그 맛에 대한 기억이 그 판단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본론

마음에 머문 것이 나오게 하라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들어간 것 이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한 사람의 생각과 사고를 만들고, 배운 것들과 함께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혹은 우리가 ‘감’ 이나 ‘느낌’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느낌’ 이라는 것도 사실 우리 안에 이미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느끼는 것이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느껴질리는 없다. 식당 이야기를 드린 것 처럼, 내 안에 들어가서 머무는 것들이 심지어 이런 느낌까지 지배하게 된다.

믿음도, 신앙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다녀보기로 하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혹은 태어나서부터 듣기 시작한 메세지들, 성경과, 찬송들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들어 온 것들은 한 번 감동을 준 말씀처럼 희미해 지기도 하고, 계속해서 복기를 해서 완전히 새겨진 것들도 있다. 달라진 식당맛처럼 이상한 말이 나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나와 하나가 된 것들도 있을 것이다.

잠언이 어린 자녀에게 충고하고 가르치는 형식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오늘 본문 17절과 18절에서 아비는 자식에게 “지혜있는 자의 말씀을 들어 마음에 두고 보존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에 습득이 되는 2x2=4 같은 산수문제가 아니라, “위 글에 표현된 작자의 심리상태를 서술하시오” 같은 언어문제에 가깝다. 그래서 여성분들이 신앙생활을 더 잘하시는 것 같다. 남자들은 구구단 같이 답이 명확한게 더 좋다. 그런 문제를 풀려면 인생의 많은 경험과 감성과 연단을 갈아넣어서 풀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말씀을 내 안에 계속해서 넣어서 나의 삶과 부딪히게 해야한다.

음식을 계속 먹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 좋을 때도 먹어보고, 안 좋을 때도 먹어보고, 배고플 때도 먹어보고, 별로 안 고플 때도 먹어보면, 진짜 맛있는 집은 언제나 맛있다. 말씀도 나의 감정과 상태와는 상관 없이 계속 넣다보면, 그 안에 변하지 않는 진리는 빛이 나게 되어있다. 그려면 말씀이 내 안에 완전히 머물게 된다. 그 상태가 되었을 때에, 내 안에 보존된 것들이 네 입술을 통해, 내 삶을 통해 나오게 된다.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에 보존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방법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신뢰를 정의한 글을 보고 메모를 해놓은 적이 있다. “신뢰는 능력과 정직성을 바탕으로 오랬동안 일관성있게 이타적으로 그리고 친밀하게 상대방을 대할때 비로서 싹튼다”
여기서 특별히 눈이 가는 단어는 ‘일관성’ 이라는 단어이다. 신뢰가 쌓이려면 일관된 자세는 필수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생각해 본다면, 문제될 건 없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까지 동일하시니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을 경험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몫인 것이 문제다.

19절에, 지혜자가 이런 좋은 가르침들을 주는 이유는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려함”이라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려면, 하나님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그저 하나님이 성경 속 인물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 능력의 하나님이 나의 삶의 영역에서 표출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진정한 신뢰를 갖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 작은 도전이라도, 작은 변화라도 시도하고, 해 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별것 아니지만, 작은 도전을 했는데, 성취되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그 분의 일하심을 느끼게 되고, 신뢰하게 된다. 성경 속에서만 말고, 내 삶의 영역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으로 행동하고, 언제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시기를 축원한다.

왕 앞에 서게하는 지혜

말씀을 마음에 지속적으로 넣어주고 보존하는 사람, 그리고 삶의 영역에서 끝 없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서, 그 분을 신뢰하게 된 사람의 결과는 아름답다. 그의 입술 위에 그 지혜가 있고, 하는 모든 행동에서 탁월함을 갖게 된다.

21절을 보시면, 이것들을 기록해서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화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라고 했다. 자식이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되던지간에, 쉽게 말해서 보스의 눈에 탁월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몇 절 더 내려가면, 29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지혜는 우리를 탁월하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일에 형통하게 한다.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지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왕 앞에 서는 탁원한 지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어떤 상태에서도 내 마음에 지속적으로 공급해주어야 한다. 말씀이 마음에 보존되고 머무르게 해야한다. 그럴 때에, 마음으로부터 입술과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해 표현되어 나오게 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도전하시고, 행동하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시고, 왕 앞에 서시는 탁월한 지혜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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