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직후부터 예루살렘에서는 교회를 향한 심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멀리 흩어지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사울은 이제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멀리까지 가서 제자들을 압송해오려고 길을 떠났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그를 눈 멀게 하신다.
눈을 멀게하신 대목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마치 사울에게 “너가 지금 보고 좇고 있는 것은 틀렸어. 보지마.” 사울은 잘못 봤고, 그 걸 믿었고, 그걸 좇아갔다. 그런 사울에게 예수님은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그냥 못 보던 것을 보게된다고 진짜를 보는게 아니다. 그가 볼 것은 따로 있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게하신다 하셨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라고 하셨다. 이름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본론
이름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짚어야겠다. 누구를 만나면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면서 소개한다. 그렇지만 이름을 무턱대고 부르지 않는다. 서양도 마찬가지로 잘 알거나 반복적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대외적으로는 성을 주로 사용하지 이름은 자제한다.
아담을 창조하신 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을 것을 첫 임무로 주셨다. 같이 살아갈 동물을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관계’를 맺으라고 그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이름으로 부르게 하셨다. 이름을 알고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들의 관계를 말해준다.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창세기 4:26 에서 셋의 자손들이 “그제서야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데서 처음 나온다. 후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동일하게 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 는 대략 이런 의미를 갖는다; 한 곳에 모여 경배를 드리고 창조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한가지 선행조건이 있다. 로마서 10장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미 구원받아 믿음을 소유한 자다. 그 사람은 주님과 가깝다. 주를 알고 주님을 이름으로 부른다.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와 제자들은 주를 부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울이 몰고오는 고난 앞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더 예배하고 더 도움을 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진짜를 보는 것
아나니아는 그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문이 다 나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훤히 보여졌다. 핍박 받고 잡혀가는 것을 봤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그 곳에 여전히 있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시야가 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라는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한다. 그 자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잡으러 온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대답하신다. “내가 사울 눈을 뜨게해서 그가 보게되는 것은 단순히 눈이 떠지는게 아니라, 이제는 진짜를 보게되는 것이다. 그 진짜라는 것은 그가 나의 이름을 위해 앞으로 고난 받을 것을 ‘보는 것’ 이다 걱정 말아라.”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눈 수술을 했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고 나와서 정신이 드니 눈에 붕대를 하고 있어서 볼 수가 없었는데, 사람들 목소리만 들리고 남을 의지해서 생활할 수 밖에 없는 그 느낌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붕대를 풀고 안약을 넣어서 붙어 있는 눈을 간신히 떼어내서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뿌옇게 보이는 눈의 느낌도 아직 선명하다. 그러다가 시간이 점차 흘러 제대로 보게되었다. 그 때 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배웠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 같이 보호하신다는 표현이 있을만큼 눈과 보는 것은 너무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사도들이 그랬고, 수 많은 초대교회 제자들이 그랬고 다메섹의 아나니아와 제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고난이 오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 이름을 위해 핍박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것. 이것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진짜 가치이다. 실제인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볼 수 없는, 구원받은 자들이 볼 수 있는 실제이다.
보는 것의 결과
저의 집에는 티비가 없다. 애들 때문에 해체해서 모셔두었다. 뉴스도 직접 찾아서 원하는 것만 본다. 온 나라가 소란하다. 아니 온 세계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전 주에 고기집에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그 시간이면 항상 자리가 없도록 차 있는 집인데, 그 큰 식당에 우리 밖에 없었다. 뉴스를 안 보고 살다보니 심각성을 몰랐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바이러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자영업이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전자상거래는 하늘 높은지 모르고 실적이 상승하고 있다. 메르스 때도 쿠팡이라는 기업이 급성장을 했는데, 이 번에도 그렇단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게 무엇인지 아는가? 불확실한 미래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이 번에 뼈저리게 배웠고. 뭔가 짠하기도 했다. 어르신들이 주로 가는 식당은 비었는데, 젊은이들이 가는 곳은 변함 없이 꽈악 차있다. 패스트푸드점, 스터디카페에는 변함이 없다.
젊은이들에게는 바이러스로 오늘 아픈 것 보다 힘들게 몇 십년 살아가는 것이 더 무섭다. 그래서 오늘도 강의 동영상을 보면서 공부를 한다. 햄버거로 한 끼 때운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가? 보고 사는 것이 다른 것이다. 오늘이냐 내일이냐. 당장이냐 미래냐. 우리는 많은 것들을 보고산다. 보는 것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마인드를 만들어 가고 그 것에 관심을 갖게 하고, 그 것에 의해서 내 삶이 정렬되게 만들어 버린다. 코로나 뉴스는 적당히 보시고, 위생 철저히 하시고 마스크 끼시고, 그거면 됐다. 저도 집에 아이들 때문에 집에 갈 때는 무척 조심한다. 이제는 말씀을 통해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더 보시라. 우리는 진짜를 봐야한다.
결론
우리가 봐야할 진짜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될까? 고난이 오는 것이 훤히 보여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보는 것이다. 사울은 눈을 뜨고, 예수님께서 진짜를 보게 하셨다. 그 이후로 사울은 다른 사람이 됐다. 왜 그런가? 진짜를 봤기 때문이다.
명품 백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짜였다. 몰랐다. 그런데, 명품 매장에 가서 진짜를 보고나서 그걸 봤더니, 영략없는 가짜다. 티가난다. 진짜를 보게되면 가짜는 더 이상 진짜로 보이지 않게 된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들 눈 뜨고 보고 있다고 그게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영의 눈을 떠서 진짜를 봐야할 때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름으로 아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과 친밀한 자들이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살자.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피해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자. 참된 것을 보고 그 것을 좇아가는 인정교회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