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18
-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서론
“쪽 팔린다” 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썼던 것 같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소위 말해 좀 “쪽이 팔렸다.” 식솔을 거느리고 있고, 종들과 많은 재산도 가지고 있는 족장인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앞에서 숨 죽이고, 아내를 누이라 속여서 살아남으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챙피한 것보다, 우리가 더 챙피해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하실 일을 기대하지 못하는 일이다.
본론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
창세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확실해지는 한가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것이다. 18장에서 봤던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소돔에 사는 조카 롯 뿐만 아니라, 훨씬 많은 사람 숫자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살기를 바라는 중보를 했다. 그 전에는 전쟁에 뛰쳐 나가서 소돔 사람들을 구해왔던 영웅이었다. 그 아브라함은 어디 가고 오늘 본문에 몸 사리는 족장만이 남았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을 만났다. 그런데 몇 십년 전에 했던 실수를 그대로 한다.
딱 우리 갖지 않은가? 예수님 만나고 신앙생활을 해도 우리의 성격이나 성품이 다듬어 지지 않는 모습을 항상 보게된다. 나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록 오늘 아브라함처럼 위기를 만났을 때에, 성숙하고 변해가는가? 변하지 않는다면 왜일까? 또, 완전히 다른 새 사람으로 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와는 왜 다른가?
이유는, 사람이 변하는 것은 사람이 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 성령님이 하시는 것. 변화가 있는 사람들을 그 만큼 성령님을 의지해서 자신을 더 비운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누리는 이 성령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했다.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얼마나 복된가. 내가할 수 없다. 성령님이 하신다. 더 나는 작아지고 성령님이 커지는 삶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수치를 풍요와 복의 근원으로
아브라함은 단순히 한 가정의 가장이 아니다, 많은 재산이 있고,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는 나름 어엿한 족장이다. 그런 그가 거처를 옮겨서 그 지역 왕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평생 같이 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식솔들과 종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어떻게 그 것이 쉽겠는가. 그렇지만 살기 위해서 아브라함 자신이 선택한 결과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가 꿀리고 싶고, 성질 죽이고 살고 싶겠는가. 그렇지만,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살아가야 하니까. 그렇게 선택을 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수치를 바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처지를 완전히 바꾸셨다.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찾아가셔서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시고, 그 뿐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더 큰 풍요를 얻게 하신다. 하나님은 수치를 더 큰 복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그것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비멜렉을 축복하고, 그의 저주를 푸는 위치로 올리신 분. 슬픔을 기쁨으로 재 대신 화관을 씌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치를 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계획이 다 있으시다. 그 계획 안에서 살아갈 때에, 이 복을 누릴 줄로 믿는다.
믿음의 눈으로 보기
오랜 시간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였다.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닫으신 하나님은 또 아브라함의 기도로 닫힌 것을 여신다. 그의 아내와 여종이 출산하게 하신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 걸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뭐야? 저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에게는 왜 금방 안 해주시는걸까? 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마지막 관문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나 이렇게 할 수 있다. 너희들에게도 일어날 것 같으냐? 믿어봐!” 물론 그들은 이 관문을 통과하고, 이제 아비멜렉처럼 그들이 축복한 것처럼 아들 이삭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다 같은 것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같은 것을 보면서 생각은 다 다르게 한다. 같은 것을 보면서 생각도 다르게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믿음으로 다르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 있다. 믿음으로 다르게 생각하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과 소망이 보인다. 우리에게 정말 수치스럽고,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쪽 팔린 일은, 믿음이 있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보이지 않는다고,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보시고, 하나님의 성취를 경험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신앙생활을 100년해도 변하지 못한다. 나는 작아지고 성령님은 커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다. 그 계획 안에서 살면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모든 것은 돌파되고 어떻게든 일어난다. 하나님의 돌파를 경험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음으로 보자.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일지라도 약속 위에 서서, 기대와 소망으로 성취를 끝내 경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