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평강과 기쁨으로

서론

시국이 이래서인지 자꾸 병 이야기를 하게되는데, 8-90년대에만 해도 병에 대해서 경각심히 확실히 적었던 것 같다. 건강보험이나 의료보험 보편적으로 잘 갖춰지지 않았기도 했었고, 그냥 조금 아픈건 민간요법으로 넘겨버리는 시절이라, 감기몸살이다 싶으면 떨면서 자고, 일어나서 괜찮으면 다시 일상을 살고, 대학교 때만해도 2주간 열이나서 아픈적이 있었는데 아버님이 미국에서 사오신 아스피린을 병채 들고다니면서 시간마다 먹으면서 버텼던 기억이 있다. 지금생각해보면 독감이었던 것 같은데, 그냥 그렇게 살았다.

사실 몸에 이상이 온다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체온계가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몸이 조금이라도 처지거나, 머리가 아프면 체온을 재고는 하는데 그런경우에 어김없이 미열이난다. 일전에 취미로 온라인으로 미국 MIT 대학교의 생물과목을 수강한적이 있었는데, 교수가 이런말을 했던게 기억이 난다. 우리 몸의 체온이 올라가는 것은 우리몸의 면역체계가 바이러스나 세균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자의적으로 체온을 올리는 것이다. 세균이 올리는 것이 아니다. 사실 체온이 올라가있는 상태가 생활하기가 불편하고 괴로워서 그렇지 우리 몸이 병을 이기는데는 더 유리한 상태다. 옛날처럼 견디면서 자는게 어쩌면 더 나은 치료법이었을지 모른다.

열, 기운없음, 피곤함 등등의 이런 몸이 보내는 시그널은 사실 더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전조현상일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정기검진도하고 병원도 예전보다는 훨씬 잘 가기 때문에, 큰 병들을 조기에 발견하기도 한다.

본론

교회는 연합을 추구해야한다

초대교회에 문제가 생겼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고 오랜기간 그 곳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중에 유대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율법에 기록된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바울과 바나바와 논쟁을 벌였다.

이 일로 인해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바로 예루살렘으로 보낸다. 사실 몇몇사람이 내려와서 자기 주장을 했다고 해서 교회 전체가 흔들릴만큼 힘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이 작은 틈이 생기는 현상을 감지하고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정밀검진을 받기로 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도달해서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 또한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베드로와 야고보, 즉 예루살렘교회의 두 기둥이 나서서 연설을 하고 설득을 하고 상황을 정리해야했을 만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해결책을 강구한 뒤에 바울과 바나바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들인 실라와 바사바라는 유다를 동행시켜서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본다.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대처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교회에 ‘분열’을 가져오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계획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합시켜 새 한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그 위대한 일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일에 대해 이들은 긴밀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항상 연합을 꾀하는 이 일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하는 줄로 믿는다. 막힌 담을 허신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가 무너지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복음이 있는 곳에는 항상 깨진 것이 회복되고, 끊어진 것이 연결되고, 원수가 친구가되는 일이 있어야되는 줄로 믿는다.

결정의 기준

예루살렘 공회에서 정한 이 결정은 단순히 한 교회를 위한 처방전이 아니었다. 이 결정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기독교 교회 전체 몸통을 이루는 두 부류가 어떻게 연결되어지고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이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했던 것은 베드로의 연설만도 아니고, 야고보의 연설만도 아니고, 성령님의 결정이었다.

물론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의견을 취합했으나, 28절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수많은 결정을 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결정을 했는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옳다는 것을. 그렇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결정들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 찰라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숙고하게된다.

우리는 고민대신 성령님께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묻는 것 뿐이겠는가? 성령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또 순종하는 것은 더 쉽지가 않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기는, 어려울 수록 중요할 수록 성령님과 함께 풀어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해결책은 의와 화평과 기쁨을 추구하는 일

사도행전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지를 보게되면, 그들의 해결의 목적이 화평, 샬롬을 이루고, 기쁨을 회복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이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신앙생활 특히 먹는 음식에 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음식에 매이지 않고 믿음으로 다 먹은 반면, 어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거스르는 음식들이나 제사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양심에 거슬려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차이로 분쟁이 생겨 화평과 기쁨이 깨어진다면 그 분쟁의 원인을 제거해버리는 것이 옳다. 차라리 고기를 먹는 이들이 먹지 말기로 하자 라고 권고한다.

원인이 무엇이든, 이유가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우리들은 일단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줄로 믿는다. 오늘 본문에서 초대교회가 문제를 해결해서 얻고자하는 결과도 역시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각지역 회당에서 계속해서 선포되는 모세에 대한 가르침의 영향을 받게될 것이고,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그들과 함께 교회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데, 갈라설 수는 없는 일이니, 이방인들에게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는 선에서 해결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초대 기독교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항상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임 가운데 임하도록 결정했다. 우리 모임 가운데도 이러한 아름다운 결정들만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예언과, 격려의 말이 큰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32절에서 보는 것처럼, 유다와 실라가 선지자로서 안디옥의 형제들에게 권면했다는 구절이다. 번역에 따라 예언이라고도 표현되고 있는데, 예언이라는 것이 점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예언은 하나님이 하시고자하는 말을 사람을 통해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유다와 실라가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형제들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말씀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교회를 든든히 서 가게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일어서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일들이 가득하게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문제를 만나고, 분쟁을 만났을 때에, 우리는 베드로, 야고보처럼, 사도바울처럼, 하나됨을 방해하는 그 사소한 문제들을 사려깊게 대쳐해야 한다. 대처해서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목표점은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 즉 의와 평강화 희락을 이루는 일이다. 이 모임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모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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