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믿음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사도행전 27:21-26

서론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종종 듣게된다. 예전에 2002년도 웥드컵 때 부터 자주 사용하고 듣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 이루어진 4강의 꿈은 정말 꿈에 가깝고 그 꿈은 다시 이루어지기 쉽지는 않은게 사실이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꿈을 쫓는 자들을 만나게 된다. 바울이 시리아지방에서 배를타고 소아시아에 가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큰 배로 갈아탄다.

이 배의 선주와 선장은 큰 모험을 하고 있다. 대박의 꿈을 안고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항해를 해 나가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 허황된 꿈은 좇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고 충고하지만, 그들은 충고를 듣지 않고, 그 꿈이 깨져가는 과정을 천천히 지켜보게된다. 우리는 두 가지 다른 믿음을 바울과 그들에게서 오늘 보게된다.

본론

너무나도 자명한 현실

때는 59년 10월이다. 누가가 9절에서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대속죄일을 말한다. 59년에는 대속죄일이 10월 5일이었다. 당시 지중해에서는 9월 14일부터 3월 10일까지는 항해를 피해야하는 시기였다. 오랜 시간동안 지중해의 선장들의 경험에 의해서 정해진 날짜였다.

바울이 배를 타고 그레데 섬의 해안을 따라 간신히 자그마한 항구에 이르는 상황이되자, 선주와 선장에게 겨울이 지나가고 항해를 지속할 것을 권한다. 여기서 바울의 충고는 사실 억지가 아니고, 계시도 아니고, 믿음도 아닌, 그냥 보편적인 상식이다. 선장이 전문가인데 거기다 대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이치대로 하자고 말리고 있는 것이다.

상식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하는 것은 욕심이다.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오는 항상 부족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가을부터 봄까지 이집트에서 실어오는 식량선에게 매우 비싼 값을 치러주었다. 그때부터 한 몫을 챙기기 위한 모험가들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선주, 선장, 선원 외에 여객들이다. 이들은 돈을 내고 배에 올라탔다. 생명을 담보로 내주어야 한다고 계약을 한 적이 없다. 욕심이다.

야고보는 욕심이 죄를 낮고 죄가 사망을 낳는다 하였고, 욕심 때문에 시험을 받게된다 했다. 또 바울은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했다. 우리도 욕심을 많이 부린다. 상식을 넘어 갖기 위해 누리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 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을 새겨야할 줄로 믿는다. 구습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시기를 축원한다.

상식을 이기는 믿음?

선주와 선장의 믿음은 상식을 이기는 믿음이었다. 앞뒤 다 자르고 문맥 없이 읽으면, 멋있는 말이다. “상식을 이기는 믿음.” 그렇다 우리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배웠다. 세상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운 믿음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큰 상선으로 갈아탔다고 했는데, 요세푸스는 600명이 넘는 사람을 태운 배를 탄 적이 있다고 기록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주와 선장의 자신감을 봐서는 꽤 규모가 있는 배였던 것 같다. 그 것이 그들의 자신감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아에서 항해를 시작해 서쪽으로 계속 가야하는데 그들은 남쪽에 위치한 그레데 섬으로 내려왔다. 맞바람이 강해 나갈 수 없음이었을 것이다. 쉽지 않게 그레데 섬에 도달해 살모네 앞을 지나갔다. 재밌는 것은 이 살모네라는 지역의 이름이다. 살모네라는 이름은 바람을 피해 숨는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 많은 항해자들이 같은 일을 겪으며 오래전 부터 지어진 그 곳의 명칭을 그들 알고 있고, 그 곳을 지나갔으며, 간신히 미항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 근처의 항구에 닿았는데,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고, 욕심을 부리고 있는지를.

운전을 하다보면 사고 잦은 곳, 사망사고 지점 같은 표지판이 붙어 있는 곳들이 있다. 그 표지판을 보면 나도 모르게 신경쓰게되고, 자연스럽게 조금 조심하게되는 효과가 있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강한 힘이 있다. 살모네를 지나가면서 그들에게 그런 효과가 있었어야 한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서쪽으로 가고자 한다.

결국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그 순간 13절에서 우리는 태풍 전야를 본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바람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분다. 때 아닌 남풍이 분다는 것은 북쪽에 저기압이라는 말인데, 태풍은 비 바람을 동반한 저기압이다.

우리가 모험을 하거나 욕심을 내다가 순한 남풍을 만나게 된다면, 유라굴라풍랑을 만나게될 가능성이 높다. 상식을 현저하게 벗어나는 일을 하면서 사람의 삶을 담보로 비윤리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는 큰 손해를 보게될지도 모른다.

상식을 이기는 믿음!

결과는 우리가 잘 알듯이, 풍랑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떠내려 간다. 가진 것 다 내 던지고, 큰 재물과 바꾸려했던 실어온 식량도 다 던져버리고 구원과 삶의 희망도 없어져 그냥 인생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버리는 것이다. 보통 태풍의 생애가 10일 정도이니 그냥 태풍이 가는데로 밀려서 간 것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바울이 서서 말한다. 내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상식 선에서만 행동했어도 좋았을 것을 그러면 조금 적더라도 돈을 벌었을 것인데. 안타깝다. 그런데, 생명은 온전한 것이고 잃는 것은 “배 뿐” 일 것이다. 선주에게는 사실 그 배가 미래다. 가진 전부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선주의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된다.

바울은 사람을 살리는 문제가 궁극적인 목표이고, 선주는 돈을 버는게 삶의 목표임을 알게된다.
우리 또한 여러 작고 큰 풍랑을 만나왔는데, 필연적으로 만난 것들도 있고, 내가 모험을 해서 만난 것도 있고, 그들처럼 상식을 벗어나서 만난 것도 있다. 그런데 우리 지금 살아있다. 우리가 잃은 것은 “배 뿐” 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은혜이다. 그 태풍 가운데 살아 있는 것이 진짜 은혜다. 한 섬에 걸려서 살게 되어 지금 숨쉬는 것이 은혜인 줄로 믿는다.

바울이 앞도 안보이고 하늘도 안 보이는 그 상황에서 걱정말라. 우리는 살게될 것이다라고 믿음의 선포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상식을 벗어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 이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짜 믿음인 줄로 믿는다.

결론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있다. 두 가지 모두 상식을 벗어난, “된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내 욕심과 배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상식을 벗어나는 믿음.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삶을 세우고 살리기 위한 믿음일 때에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살게될 줄로 믿는다. 우리가 풍랑 해처나오면서 살아 있는 것, 잃은 것이 “배 뿐”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의 삶을 사시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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