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내 기도는 왜 응답이 없나

예배 타입
컨텐츠 타입
시리즈
성경권
설교자
주제
본문

창세기 21:14-19

예배일시

2021년 3월 17일

창세기 21:14-19

  1.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2.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3.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4.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5.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6.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서론

우리는 모두 바램이 있다. 우리집 아이들은 젤리 한 봉지 더 먹는 것이 바램이지만, 그들 아버지의 뜻은 이빨이나 닦았으면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시험을 잘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하나님은 시험에 빠지지나 말았으면 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돈을 잘 벌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그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경우 상충되는 바램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돈을 벌면, 저 사람은 돈을 잃어야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런 경우에 바램들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다.

본론

바램들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드디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어주고, 할례를 행한다. 그리고는 그간 기다림이 조금은 허무하게 느겨질 만큼 짧은 서술은 끝나고 바로 시선이 하갈에게로 옮겨간다. 21장이 이삭이 태어난 장이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마치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인 것 같이 느껴진다.

사라는 자신이 먼저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고자 했었고, 그런데, 하갈이 임신을하니 쫓아내더니, 이제 이삭이 태어나니,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까지 쫓아내려고 한다. 사라의 성격은 보통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너무 간절했던 아들에 대한 바램이, 질투가 되고, 이제는 이삭에게 물려줄 유산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이스마엘을 떠나가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불 같은 사라의 감정에 하나님이 계속 인정해주시고 반응해 주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갈에게 계속 떠나가게끔 하신다. 사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명하신다.

하갈은 광야에서 해메면서 또 그녀만의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번에는 하나님께서 하갈의 간구를 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그들의 생명을 건져주신다.
당최 모르겠다. 하나님이 무슨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누구의 간구를 들어 주시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

교회에 성도A가 있고, 성도B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둘이 동종 업계에서 일하고 있어서, 한 명이 잘되면, 한 명은 손해를 보는 입장이다. 둘다 하나님께 사업이 잘 되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다.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A의 사업이 더 잘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하는 간구에 응답하시고, 모든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A를 더 사랑하셔서 A의 사업이 더 잘되게 하시고, B는 안되게 하시는 그런 결정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결정은 사라와 하갈 사라의 갈등에서 본 것 처럼, 간구하는 이의 자질이나 더 사랑받을 만한 조건 등에 의해서 내려지지 않는다. 사라는 결코 인격적으로는 그런 지속적인 응답을 받을만한 그릇이 못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확실히 있으셨다. 아브라함이 큰 민족이 되고, 그들을 통해 모든 이들이 복을 받기를 원하시는 뜻이 있으셨다. 그런 뜻이 있으셨기 때문에, 사라의 기도에 응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응답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바램과 간구보다 더 크고 중요해서, 항상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데, 정말로 신기한 것은 우리의 기도가 많은 부분 응답이 된다는 점이다. 그건 또 왜그럴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바램대로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셨는데 그것이 하갈의 기도가 되기도 하고, 이스마엘의 울음소리가 하갈의 기도 응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각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렵지만,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는 일들이 우리의 간구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저 감사한 일이다. 창세기를 강해하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그래서 우리의 삶과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맞아야만 복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쯤되면, 우리의 추악한 심령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러면, 어차피 내 바램대로, 기도대로 이루어질 것 아니라면, 열심히 기도할 필요가 있나?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 사라는 인간적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생 따라서 산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는 분명히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뜻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따라살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믿음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받는 삶을 사는 특권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꼭 오늘 말씀드린 맥락 안에서 기억하자. 그 나라와 그 뜻을 구하는 자에게 무엇이든지 허락하신다는 원리를 말이다. 우리가 각자 걸어가는 모든 신앙의 여정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하루만에 응답이 올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 아브라함처럼.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하나님의 뜻은 무너지지 않고 반드시 서게 된다. 끝까지 인내하고 기대하셔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 바램과 기도들을 드리며 살아간다. 같은 것을 위해 둘이 기도하면 누구에게는 기도응답이고, 누구에게는 거절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을 이루신다. 욕심에 의해서든, 질투에 의해서든, 기쁨과 사랑과 증오에 의해서든 그것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내하고 기대하자.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