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구는 땅
2020년 11월 4일

내가 일구는 땅

예배 타입
컨텐츠 타입
시리즈
성경권
설교자
주제
본문

창세기 3:17-24

예배일시

2020년 11월 4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17-24

서론

비속어이긴 하지만, “삽질한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이다. 쓸모 없는 일을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비속어인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삽질”을 보고있다. 원래 아담이 살던 동산은 사람이 먹고살기에 부족하지 않고, 수고가 없어도 충분히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상태로 유지가 되었는데, 이제는 수고를 해서 삽질을 해야만 그렇게 유지가 되게끔 바뀌었다. 사회의 구조가 효율적인 노동관리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노동이 중요한데, 성경은 노동과 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오늘 가르쳐주고 있다.

본론

죄의 의미

우리가 선악과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아무래도 가장 먼저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바울의 구원에 대한 신학이 워낙 이 구절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 또한 거기에 익숙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여러 고대근동의 신화들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너무 특별한 구절들이다. 여느 신화들에는 신과 인간 사이가 “죄”라는 개념 때문에 멀어지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욕심이라던지, 악을 추구하는 것들이 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신화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우리는 또 알 수가 있다. 신의 관점이 전혀 대변되어 있지를 않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죄에 영향을 크게 받으신다. 인간에게 조취를 취해서 에덴 동산에서 같이 머물수 없도록 하셨다. 우리는 죄라는 것이 단순히 내가 깨끗했는데,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상태이다. 나의 죄는, 하나님이 나와 같이 거하실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죄를 지으므로 더럽혀지는 것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고 인식해야한다.

파라다이스에 대한 갈망

그렇다면 본문에서 아담과 하와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완벽했던 에덴동산을 잃은 것인가? 아니다. 그들이 잃은 것은 그들 가까이 오시던 하나님을 잃은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이후로 에덴을 기억하고 갈망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의 인물들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 그리고 오셔서 구해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그들은 낙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다윗만큼 하나님을 찾고 찾었던 이는 드물 것이다. 다윗이 겸비하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이유는 용서해 주시기를 원해서만이 아니다. 그의 기도처럼 나를 멀리하지 마시기를. 떠나가지 마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셔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란다. 많지는 않지만, 몇 왕들이 율법을 다시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들을 회복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찾아오실만한 처소를 준비하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 말 잘 듣는 백성이 되려는게 아니다. 그런 노력으로 되는게 아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해결되는 문제다. 왜 정해주신 제사를 드려야 하고, 절기들을 지켜야 했는가? 그것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처소를 준비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천국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계신 곳인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소망을 갖게되시기를 축원한다.

내가 일구는 땅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결론적으로 일구는 땅이 바뀌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도록 에덴 동산을 일구던 아담은 이제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땅”을 일구어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 이외에 모든 과실을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 말은 생명나무는 먹어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먹을 필요를 못느껴서인지 그때까지 먹진 않았다. 맛이 없게 생겼을지도 모르고, 아직 생명에 대한 위협을 못느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생명에 관한 것보다 ‘지식’에 관한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왜일까?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의 자립성 원치 않으셨다. 스스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 의존적이기를 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실수 있도록 꾸준히 처소를 예비하기를 원하셨고, 그것이 아담의 삶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방식을 원하셨다.

선악과를 먹고 인간 스스로의 방식을 택한 후로 받게된 가장 큰 불이익은 노동이 ‘삽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고귀한 것이고,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과정이었는데, 그저 먹고 살기 위한 행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더 슬픈 건 내가 나의 땅을 일구고 먹고 살아서 다다르게 되는 종착점이 평생 일한 땅으로 돌아가는 먼지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의 노동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무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다. 우리가 매일하는 일을 스스로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우리가 땅의 먼지가 되는가 아니면 하나님 곁에 머무는가를 결정한다.

하나님이 오시는, 하나님을 위한 땅을 일구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도록 삶을 일구어야 겠다. 하나님이 멀리가시지 않도록 나를 지켜야 하겠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내가 현재 일구는 땅은 무슨 땅인가. 창조된대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노동은 원래 거룩한 것이다. 나를 위해 삽질을 하는가, 하나님을 위해 노동을 하는가 하는 선택은 나를 한 줌의 먼지가 되게할 수도 있고, 하나님 곁에 머물게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존적이기를 원하신다. 우리 스스로 판단해서 다 해결하고 보고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나의 일이 거룩한 것이 되려면, 하나님을 모시는 일에 하나님을 나에게로 가까이 오시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 오셨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성령 하나님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성령하나님을 모신 삶은 거룩하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은 거룩하다. 성령님과 함께 우리가 일구는 땅이 하나님을 모시는 처소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