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부활이 무슨 의미인가?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행전 4:1-4

서론

'부활'이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믿는바, 진리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터지만, 사실 부활이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2020년에 얼마나 현실적이고 피부로 느껴지게 다가오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그 적용사례를 대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근래 묵상집을 통해 사도행전을 다시 묵상하게되었다. 3장에서 성전 미문에 앉은 못 걷는 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뒤, 백성들에게 말 하고 있을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그들을 잡으러 온다. 잡으러 오는 장면 가운데 2절에 보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연후에,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크게 미움을 받고있지 않았다. 평민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유대 지도자들이 "부활"을 콕 집어 싫어하며, 거슬려서, 그들을 저지하려 했다는 점은 분명 그들에게 부활이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무엇가였음을 말해준다.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우리들은 부활이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답을 찾기 어려운데, 예수님을 핍박하고 또한 제자들 또한 그러려 하는 사두개인들을 필두로한 지도자들은 '부활'때문에 삶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본론

사두개인과 우리의 부활

사두개인들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자. 사두개인들은 스스로를 사독의 후예라고 칭했다. 이름도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사독은 아론의 후손으로서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릴 당시의 대제사장이다. 사두개인들은 기록된 토라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이 해석하고 가르친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바리새인들이 보편적으로 믿었던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두 파 간에 마찰을 사도행전에서 목격할 수 있다. 안 믿는 것은 알겠는데,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 우리보다 더 신경쓰고, 예민하게 부활에 반응해야했던 저의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위치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로마와의 관계를 잘 유지해 가고 있다. 로마는 민중들의 마음을 사두개인들에게 잘 다스려주고 안정시켜주는 대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존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백성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고, 인기를 얻고, 마음을 빼앗아갈까 사두개인들은 그들이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통제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로마를 건드릴만한 행동을 하지않기 위해 그런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 사역의 가장 클라이막스다. 부활 없이 십자가는 의미가 없다. 그 예수님의 부활을 막아선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삶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욕구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알게되고, 또한 사탄은 죽이는 일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게된다. 무슨 말이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의 생명 또한 부활시키신다. 하나님의 살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창조자, 만드시는 분, 창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와 정면으로 맞서 사람들로 하여금 손에 쥔 것을 지키도록, 더 올라가기 위해 욕심을 부리도록, 진리 보단 허영을 추구하기를 부추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한 일들의 끝에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두개인들 보다 부활에 무관심하다 라고 몇 번 언급해드렸는데, 이 것이 2000년이 지난 현재를 사는 기독교인들인 우리가 다루어야할 중요한 문제들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어떻게하면, 사단의 이 공격을 이겨내고, 우리의 삶 속에 부활의 능력이 의미가 있고, 너무나도 예민하게 반응할만한 가치있는 것이 될까?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그러기 위해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을 무력화시켰음을 기억해야한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잠든 것들의 첫열매가 되셨다고 했다. 루터는 이 구절을 가지고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대부분을 이미 처리하셨다. 아직 남아있는 부분은 깊이 잠들어 있는 정도와 다름없다. 그래서, 나중에 일어날 우리의 부활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이 여겨야할 것이다."

여기서 루터를 통해 나는 그가 얼마나 죽음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든 것들의 첫열매가 되셨다는 구절을 수 없이 읽으면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잠에 드는 것을 두려워할 것은 없다. 밥 먹고 잠시만 멍때려도 들어버리는게 잠이다. 루터는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죽음이라는게 그런 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고는 부활에 대한 분명한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루터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 되시고 우리는 몸이다. 아이를 출산할 때나 동물들이 출산할 때를 보게되면, 머리가 나오게 되면 몸은 자연스럽게 쉽게 나오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월하셨고, 하늘에서 죄와, 죽음과, 악을 다스리신다. 그러시고는 몸인 우리들을 자연스럽게 이끄신다. 지금은 그냥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시기 전 한 밤 중에 불과하다."

부활은 인간에게 무엇보다 두려운 존재인 죽음을 "깊은 잠"이 되게 한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잠든 자들의 첫열매가 되시고, 머리가 되셔서 하늘에서 다스리시며 몸인 우리들을 머리를 따라 자연히 죽음을 이기게 하신다. 부활은 우리 삶이 두려움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기대가 가득차게 한다. 부활의 능력이 내 삶에 일어나기를 항상 기대하는 삶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올바른 삶의 목표 설정

둘째, 부활은 우리의 삶이 살아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본문의 사두개인들은 삶의 목표설정을 잘못했다. 권력과 힘을 유지하고 더 얻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고, 지켜야하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말씀의 정반대의 삶을 택했다. 삶의 목표를 그런 곳에 세우면 가장 문제되는 것은 "실패"했을 때에, 죽음을 맛본다는 것이다. 그것을 추구할 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 죽음에 가까워져간다.

이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빠지기를 바라고 있는 함정이다.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사는 인생에 목표를 세우지 않고, 나만을 위해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함정에 빠지면, 죽음을 맛보게 한다. 죽을만큼 힘들게 일하고 죽을만큼 돈을 벌어, 결국 남아있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에, 정말 죽음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원대하게 세울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매일 매일 죽음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점점 생명과 삶아있음을 체험하는 부활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부활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디에 전문가이신가? 만드는데 전문가이시다. 죽은 것 살리시는데 전문가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
하나님은 죽은자를 생명으로 옮기시는 분,
하나님은 절망을 희밍으로 바꾸시는 분,
하나님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시는 분,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든 살기를 원하신다. 죽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 돌아가셨다 살아나셨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셨다.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2천년 동안이나 이 지구상에 한 번도 줄어든적이 없이 그 수가 계속 증가해 왔다.
아무리 칼과 창을 들고 사탄이 죽이려 해도, 살고 살고 또 살아서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삶이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안보이고 막막하다할지라도, 우리는 죽지않고 살아서 주님의 의를 노래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지 않고 아름다운 삶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기를 원하신다.

결론

우리는 이제부터 죽을 힘을 다해 살지 말고, 어떻게든 우리를 살리실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자. 우리의 삶 속에 쉴새 없이 역사하시는 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그 가치가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빛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homearrow-downarrow-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