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13-19
-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서론
창세기 23장은 사라가 127년을 살다가 죽게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 성경이 이 지면을 통해 전달하고자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실 전달이나, 아브라함의 슬픔이 아니다. 오히려 사라를 장사할 장소에 대한 할애를 많이 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 절기에 본문과 함께 두 죽음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나누어 보고자 한다.
본론
땅을 소유하게되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들어가서” 슬퍼하며 애통했다. 아브라함은 정착민이 아닌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장막생활을 했고, 사라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슬퍼한 것이다. 그렇게 슬퍼하다가 일어나 나가서 그가 한 행동은 주변에 살던 헷 족속에게 가서 한가지 청을 한 것이다. “나는 나그네니 아내를 장사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 땅을 내게 주어라.”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게 극진히 대하고 친절하게 대한다. “내 주여 들으소서” 라고 대답을 시작하는데, 여기서 “주”라는 히브리어는 왕이나 왕자에게 쓰는 말이다. 그러면서 대답한다. “우리의 묘 아무 곳에나 원하는데로 안치를하시라, 금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극진히 대접하고, 높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대답에는 아브라함이 원하는 바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브라함은 땅을 사기를 원했다. 그냥 빌려서 안치를 하게되면, 나중 후대에 가서 그 묘 자리는 유실이 되고 말 것이다. 아브라함은 온전히 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어했다. 헷 족속은 땅을 팔고 싶지는 않은 듯 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더 극진하게 몸을 굽히면서 원하는 땅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주인을 찾았는데, 그도 역시 원하는데로 장사를 하시면 된다고 대답을 한다.
거기에 대고 아브라함이 더 낮은 자세로 에브론이라는 사람에게 땅을 사겠다고 노골적으로 의견을 나타내자, 사백 세겔이라는 가격을 부르는데, “밭머리에 있는 굴”에 해당하는 가격치고는 엄청난 가격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은 평생이 걸려도 모으기 힘든 돈이다. 땅을 팔기 싫고 해서 무리한 가격을 요구한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현재 아내를 잃었고, 낮은 자세로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장사하기 위해 비싼 값을 치루고 막벨라 굴을 사게된다. 130살이 다 되도록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았지만, 아브라함은 소유한 땅이 전혀 없었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땅에 보내시면서, 그 땅을 주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라가 죽으면서 처음 “땅”이라는 것을 소유하게되었다.
슬픔 속에서 약속의 성취를 향해 전진하다
아브라함은 아내에 대한 예를 갖추려고 한 것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아주 의미있고 귀한 일을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슬픔의 순간에도 희망과 소망의 씨앗을 심으시게 하신다. 약속하신 아들을 얻게하시고, 장성하게 하신 후에, 드디어 땅을 소유하고 정착하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주제를 크게 보았을 때에 우리는 큰 두 가지의 개념을 보게된다.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 성경은 “사랑으로 완성하는 하나님 나라”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창세기에서는 번영과 확장에 많은 포커스가 있다. 아브라함이 슬픔 가운데 있었으나, 그는 은연 중이었을지 몰라도, 전진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과 땅의 확장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비싼 값을 치룬 약속의 성취이다
사라의 죽음에 관한 본문이지만, 고난 주간에 예수님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브라함이 비싼 값을 치루고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한걸음을 내딛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떠하셨나. 그 무엇보다 값비싼 자신의 피 값을 치루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그 길을 걸어가셨다.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바라시면서 걸어가셨다. 예수님의 희생과 인내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하는 모든 과정의 모통이 돌로써 사용되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며, 우리의 충성과 헌신이 의미가 있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의 한걸음 한걸음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결론
사라는 비록 죽었지만, 아브라함은 비록 사라를 그저 슬픔 속에서 장사지내려고 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심으셨다. 가나안땅을 사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반역자로 몰리시고, 젊으신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맞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 인류를 향한 뜻을 위해 모퉁이돌로 예수님을 세우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열정과 충성만이 하나님 나라의 밑거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순간, 심지어 슬픔과 애통의 순간도 하나님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재료로 사용하신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계신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그 또한 하나님께 드리시고, 여전히 약속과 언약을 붙들고 전진하고 계신 하나님을 붙드시기를 축원한다. 성도님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받는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