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스바냐 1:4-10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라
서론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끼게되는 것은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아는 것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고, 준비하고 있는 것도 어렵다.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유일할 정도로 배달문화가 고도로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생활하는데 있어서는 이번에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프라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 그것 뿐인가? 중국에 조금 고마워 해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사 때문에 확대된 마스크의 생산 덕을 톡톡히 봤다. 이제 황사마스크는 이전 가격으로 거의 돌아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전세계의 사람들과 똑같이 마트가서 사재기를 하느라 난리났을 것이고, 마스크가 없어서 방역에 더 어려움을 겪고, 경제의 침체를 더욱 경험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인 것은, 한국인들의 철저한 준비덕일 수도 있지만 이런 모든 준비들이 위기 상황이 닥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 주요했다. 그것이 중요한 것 같다. 위기와 환난이 닥쳐오기 전에 미리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스라엘, 유다가 항상 놓치던 것이 그 것이다.
본론
무탈할 때에 조심할 것
하박국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아왕 때 무렵에 활동을 했다. 요시아왕이 율법서를 발견하고, 개혁을 단행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나라를 세워갔을 때 온 결과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부국이고, 평화였다. 약 70년 동안 유다는 나름대로의 부국과 평안을 누렸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샬롬이 있을 때마다 일어나는 일은 우상숭배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왜 해가 뜨는지, 왜 비가 오는지, 왜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는지, 하늘에 별은 무엇인지, 달은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신이고 신의 영역이었다. 오늘 같이 더운 날에는 당시는 농경사회니까, 태양신님이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라고 생각하지, 장마전선이 다 물러가고 이제 북태평양기단의 영향을 받아서 습하구나 라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어려울 때는 주님 찾다가, 별일 없으면, 만사가, 일상이 세상 온갖 신의 언어로 표현되고, 자기들도 모르게 젖어드는 것이다. 4절, 5절에서 바알과, 그마림과, 하늘의 별을 경배하는 자들과, 말감에게 맹세하는 자들을 멸절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아닐까? 우리도 똑같다.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있을 때는 주님을 찾다가, 무탈할 때, 별 큰 문제가 없을 때, 신앙생활도 잘하고 있는 것 같은 그 때가 문제다. 무탈하면 하루하루 그냥 일상을 잘 살아간다. 그러면서 일상의 언어들과 세계관에 방어 없이 노출된다. 우리는 고대사람들처럼 해와 달과 별과 자연현상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의 언어들, 경제와, 정치와,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무탈할 때는 돈을 쓰는 것,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의 일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에서 자신에게로, 혹은 자신이 지금 영향받고 있는 누구에게로 옮겨간다. 정치를 예로들자면, 유투브든 인터넷이든, 오른쪽 치우친 것을 보다보면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고, 왼쪽으로 치우친 영상 보다보면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분명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치우쳤는데, 거기다가 하나님을 덮어 씌워놓고 그게 하나님이라고 우긴다. 그렇게 되면 더 큰 문제가 무엇이냐면, 반대 쪽은 하나님 반대니까 사탄이라는 것이다. 온갖 음모론과 소설들을 성경책보다 더 믿으면 되겠는가? 성경책보다 더 보면 되겠는가? 성경책보다 더 주위사람에게 전해주면 되겠는가?
무탈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닌 것에 귀를 더 귀울이게 된다. 그것이 고대사람들이 행하던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의 귀를 현혹시키고, 우리의 생각을 어그러트리는 것이다. 우리는 무탈할 수록 하나님으로 우리의 생각을 정렬해야할 줄로 믿는다.
하나님을 찾고 구할 것
우상숭배는 그 자체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6절에서 문제의 본질을 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자신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시겠다고 하신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고, 묻지 않고 찾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찾겠는가? 내 자신의 판단을 믿게되고, 사람을 믿게되고, 상황을 믿게되고, 돈을 믿게된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어려울 때, 힘들 때를 말하는 것 아님을 아셔야된다. 별 문제 없을 때, 무탈할 때, 어려움 없을 때,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지, 하나님을 구하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청년들을 만나 일주일의 삶을 들어보면, 큰 일이 있었던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지인들도 오랜만에 연락해서 물어봐도, 잘 지낸다고, 별 일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그리고 대부분의 일상은 고난이나 고통이라고 표현할 만큼 어려운 일의 연속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샬롬의 시간이 그저 감사의 시간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찾고, 구해야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왜인가? 그것이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성도의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기독교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하는 삶의 자세가 있다. 주님의 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날에 대한 자각이 떨어지면, 마스크가 없는 코로나와 같다. 무탈 할 때일수록, 평안할 수록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만 의지할 것
8절에 하나님이 또 한 부류를 벌하시겠다고 하신다.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은 민족을 억압하는 이방인들과 그들과 조력하는 자들을 벌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사람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런 자들은 문턱을 뛰어넘어서 자기 주인의 집을 배불리는 자들이다. 사무엘서를 보면 법궤를 빼앗긴 후에 다곤 신상이 엎드려져 부서진 연유로 그들이 그 후로 문턱을 밟지 않게된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우상 숭배와 우상숭배와 함께 권력에 기대 사는 자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어찌보면 매우 간단명료하다.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라." 우리는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어려운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그 룰이 신앙생활에는 적용이 안된다.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자.
결론
우리는 힘들고 궁핍할 때 하나님을 찾는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불신자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난 풍요할 때, 무탈할 때에 무엇을 찾는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그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되는 줄로 믿는다. 우리의 잘 됨과 평안함을 하나님 덕으로 돌리는 방법은, 평안할 때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다. 주의 날이 언제 임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은 여호와만 의지하는 자세를 갖추지 아니한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을 신뢰하자. 하나님을 찾고 구하자. 준비된 자세로 주의 날을 맞이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