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문학적인 요소로 사용될만한 단어다. 우리 가까이 존재하는 일반적인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을 묘사할 때 이방인이라 하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외면 받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요즘 외국인이 정말 많아졌다. 군자동은 세종대가 있고, 기숙사가 있어서 인지, 교회 뒤쪽 도로에 외국인이 바글바글하다.
청년들과 주말에 건대에 나가면 외국인들이 거의 없고 한국 젊은 청년들이 가득한 반면에, 그 시간에 우리 동네에 와보면 식당이나 거리에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몰려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은 확실히 이방인이다. 우리의 사회규범 밖에 있고, 심리적으로 외롭다. 우리 나라의 다수가 하는 소비형태를 따라하지 못하고, 주말에 젊은 이들이 몰리는 곳에 가지 못하며, 소수끼리 모여 소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방인이다.
반대로, 다수의 한국인들도 미국에 가면 소수 중의 소수가 되고 우리나라의 외국인들처럼 삼삼오오 모여 시내보다는 동네를 전전긍긍하며 생활해 간다. 저도 미국에서 그랬다. 완벽히 소수민족이었다.
본론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란
이렇게 일반적인 규범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과 그것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의 사람이 있을 때에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성립되고 의미가 있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이방인”이라는 단어는 사실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
성경에서 이방인이란 “유대인” 외의 사람들이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 의미가 바를지 모르겠지만, 그 이방인이라고 칭해지는 “그리스인”들이 팔레스타인 주변의 국가들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유대인들이 오히려 소수민족이며, “이방인”이라 칭해짐이 옳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소수민족으로써 전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을 이방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그들이 온 세상의 주인인 하나님께 “선택받았음”이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 스스로가 중심이며 나머지는 다 주변일 뿐이다.
빛으로 부르심
그런데 사실 그들이 가장 중요한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 또한 먼 이방 땅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 가운데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빛이 되어 모범이 되어야함이다.
아기 예수님이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을 때, 시므온이 예수님을 안고 이렇게 고백한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시고자 한 일은 이방에 빛을 비추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빛을 보고 모두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함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성경을 다시 한번 조명해 보면, 빛이신 하나님께로 모든 인류가 나아가는 것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성경이 서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유대인들의 분노의 이유
바울의 연설 가운데,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고,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했을 때에, 영문도 모르고 소요에 휘말렸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점점 바울의 말에 설득되고 납득이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21절에 예수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보냈다. 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더 이상 바울의 연설을 듣지 못하고 엄청난 분노를 표한다. 그리고 천부장과 영내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 분노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을 찾아 내려가보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로 마음을 향하셨다는데서 그들이 질투를 느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조상대대로 그들의 소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방에게로 향하라 했다고 하니 분노를 하고 있다.
시민권과 이방인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유대인임을 설득하던 바울은, 아이러니하게도 천부장 앞에서는, 나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이다라고 반대로 이방신분을 드러낸다.
드러낸 이 후 바울은 더 이상 천부장에게 이방인이 아니기에 그가 돌변하여 친절히 대하는 것을 누리게된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우리는 하나의 시민권을 갖었는데, 바로 하늘에 우리의 신분을 둔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방인 이라는 개념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이 시민권, 저 시민권을 넘어 결국 인간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기준이 맞춰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이방인을 정의하고, 로마는 그들의 시민권을 바탕으로 이방인을 정의하며, 우리도 또한 우리의 사회규범을 통해 이방인을 정의한다.
결론
오늘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드렸는데, 몇가지 이 이방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기 원하는데,
첫째는,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방으로 향하는 빛으로써 우리에게 비추어 지셨고, 우리가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명령 중 하나는 우리 또한 빛이되라는 것이다. 빛을 특성은 보는 것들이 빛을 향해 자연스럽게 가게 되고, 빛은 등대와 같이 길잡이가 된다는 것이다. 이 명령 따라 세상 가운데 등대와 같은 빛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둘째는, 이방인들을 향해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이다. 성경은 나그네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을 선대하라 가르친다. 우리 주변에 외국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상인이라고 은연 중에 정의한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론 저 스스로도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이방인들을 선대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삶인 줄 믿는다.
셋째는, 스스로 이방인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라는 그 찬양의 뜻은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영원히 머물게 될 나라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빛되신다. 그 빛을 향해 우리는 오늘도 걸어가고 있다. 이 이방인의 영성으로 영원한 하늘나라 바라보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