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경험하고 있는 성취

창세기 18:6-14

  1.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2.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3.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4.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5.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6.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7.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8.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9.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서론

성경 속의 인물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훈련을 시키시든지, 그들이 살면서 겪은 일에 의해서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된다. 심지어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도 하나님께 쓰임받기위한 평생의 준비를 거친 것을 그가 가진 여러 자질에서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주시는 것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들의 상태가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그것에 대해 몇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본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갖자

더운 한 낮에 아브라함이 사는 곳에 나그네들이 지나다가 들르게된다. 아브라함은 장막 앞에 앉아있다가 세 명의 나그네를 보고 바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힌다. 그리고서는 장막에 머물기를 청한다. 그들의 행색이 범상치 않았을 수는 있으나, 아브라함의 이 적극적인 자세는 지긋한 나이에 놀라운 반응이다. 그리고서는 발을 씻고 그늘에서 쉬게 하는 것을 넘어서 먹을 것을 챙기는데,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사라에게 세 스아의 고운 밀가루로 떡을 만들라 명하는데, 세 스아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떡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그것뿐이 아니라, 송아지를 잡는데, 고대 시대에 소는 결코 평민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닐 뿐더러, 송아지는 더더욱 그렇다. 세 사람이 먹을 양이 아니라, 잔치를 베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왜 이렇게 아브라함이 극진히 반응했을까?

그의 자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가는 자세다. 하나님이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와 사이에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시겠다고 드디어 구체적으로 약속하셨다. 언약의 성취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매일 같이 장막 앞에 앉아서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만 해봐라. 내가 놓치지 않으리.

우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금방이라도 임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고 산다면, 매일 어떤 일 앞에서든 적극적이게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머무시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태도가 분명히 반영되어야 한다. 반드시 임할 하나님의 성취를 기다리며 매일을 적극적으로 사시기를 축원한다.

나의 믿음을 나의 삶으로 증명하라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이 새 이름을 받고, 이삭이라는 자식의 이름 또한 받았다. 모든 약속의 성취가 그림이 그려졌다. 그런 흥분되는 일을 사라에게 말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사라 또한 전해 들었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어떤가? 아들이 내년 이맘때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속으로 웃는다. 아브람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누구라도 지나가면 뛰어나가 맞아들이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기대와 기다림이 사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아브람함의 믿음이 사라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말이다. 누가 내 옆에서 큰 믿음으로 약속을 성취한들 내가 취할 분량은 거기 없다는 말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믿음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다는 것은 나의 기다림이고, 하나님께 소비되는 시간도 나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사라는 그 웃음과 그리고 하나님께 그 웃음을 지적받고, 자세를 고쳐먹는 자신의 변화가 필요했다. 아무리 옆에서 아브라함이 기대하고 믿고 있어도 사라가 그렇지 못하다면, 이삭은 올 수 없다.

나의 믿음은 그 다른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으로도 증명될 수 없고, 나의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내가 믿는가. 내가 기다릴 수 있는가. 내가 시간을 드릴 수 있는가. 삶으로 나의 믿음을 증명하셔서 약속의 성취를 보게되시기를 축원한다.

이미 시작된 약속의 성취를 누려라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어디있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장막 안에 있다고 대답한다. 잔치가 열렸는데, 사라는 장막 안에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유교문화처럼 고대 시대에 남녀가 같이 식사를 같이 할 수 없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식사에서 사라가 빠져있다는 것이 의미하는게 있을 수 있다. 최근의 학계의 새로운 분석이고 학설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은혜가 있어서 말씀드린다.

창세기에서도 라헬의 경우에 언급되지만, 여성이 접촉을 피하고 격리하는 경우는 생리를 하는 경우이다. 사라는 워낙 고령이기에 고려조차 하지 않고, 병적인 하혈로 생각했을 수 있지만, 이미 하나님의 언약대로 임신을 위해 멈추었던 생리가 다시 시작했던 것일 수 있다.

사라에게처럼, 우리에게 예비된 하나님이 계획도 이미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일어나고 있는 것을 믿음의 부재로 인해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래서 얻지 못하면 되겠나.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실 수 있기를 축원한다.

기한이 이를 때 움직이신다

나그네들이 하나님의 사자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후에,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에게 임한다. “사라야 왜 웃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 있겠느냐.” 이말이 정답이다. 세상만사 굴러가는 것을 우리가 능력 없다고 판단하고 포기하고 하면 되겠는가
하나님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사라에게 말씀하셨다. “기한이 이를 때 돌아올 것이고 성취될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함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해드릴 수 있는가 없는가만이 문제가 된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점진적이며, 끝 없이 증가해왔다. 그 큰 드라마의 한 부분인, 나를 향하신 계획과 성취는, 한 순간에만 반짝 빛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나의 믿음으로 나의 시간을 드리고 나의 기다림을 갖는 반응으로 살 때에, 그 계획과 성취는 드러나고 기한이 되었을 때에 성취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미 성취는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하나님께 어이 없는 웃음이 아닌,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그래서 성취를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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