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8-15
-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서론
- 공자가 논어에서 온고지신이라는 말을 했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배우려고 노력한다.
- 우리가 성경을 대함에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했다.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또한 성경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아는 일이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외국에 대해 매체를 통해서만 접해왔다. 할리우드 영화들과 미디어를 통해서만 접했다. 실제로 그들이 평범하게 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이 다 키도 훤칠하고, 잘생기고 금발이고 그럴 것만 같았지만, 사실 평번한 일상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처럼, 큰 사람 작은 사람, 금방머리 검은머리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다.
- 집들도 잔디가 펼쳐져 있고, 한가롭고 아름다운 모습일 것만 같지만, 다 목조 건물이여서 냉난방비 많이 들고, 개미 꼬이고, 잔디 깎는게 귀찮아서 시멘트로 다 매꾸어 버리고 싶다.
- 우리가 무엇에 관해 처음 접하게 되면, 그 이미지는 머리 속에 그대로 남아 앞으로의 판단을 계속해서 좌지우지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모든 환경과, 속해서 자라온 문화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본론
1.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기적과 반응
-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돌로치려하자, 루스드라라는 곳으로 전도지를 옮긴다. 바울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태어나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가 “듣고” 있었다.
- 듣다가 그에게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믿음 있음을 눈으로 봤다.
- 일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듣는 것에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믿음은 눈에 띌만한 어떤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눈에 띌 만한 어떤 모습으로 반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 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자신의 마음을 만지는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이다.
- 평생을 걷지 못하던 그 사람이 말을 들었을 때에, 그의 안에 소망과 희망이 생겨났다는 것으로 유추해 볼 때에, 질병이 고쳐지고, 기적이 나타나는 것들을 바울이 말하고 있었을 듯하다.
- 그 생명과 기적의 이야기들을 듣자, 그 안에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생겨, 그의 얼굴 빛이 변하고 바울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 그 사람을 향해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라고 외치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다. 많이 들어서 우리가 알고 있지만, 이 기적은 단순히 치료가 아닌, 창조사건이다. 없던 근육이 만들어지는 찰나의 순간이다.
- 그 도시의 사람들의 반응이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봐야할 대목이다. 그 기적을 보고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땅에 인간의 모습을 쓰고 내려왔다고 소리지른다.
루스드라 시민들이 가졌던 신에 대한 관점
- 오비드라는 고대작가가 있다. 메타모포시스 라는 책에 1세기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전설에 의하면,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브루기아 지방에 왔는데,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반겨 들이지 않았는데, 노부부가 그들을 잘 맞아들여, 그들에게 새 성을 주고, 나머지 반가지 않은 집들을 파괴했다는 전설이다.
- 이들이 두 남성이 나타나 이러한 엄청난 창조적인 기적을 행했을 때에, 자연스럽게 살아오면서 들었던 이 전설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 내려오는 전통에 의하면, 바울의 외모가 조금 “웃겼다” 고 한다. 머리도 없고, 다리도 조금 휘어져 있고, 눈썹도 일자 눈썹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울이 말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여겼고, 바나바는 아무래도 좀 더 근엄한 제우스의 모습으로 여겼던 듯 하다.
- 이들이 반갑게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빨리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을 데려다가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 바울과 바나바는 그때까지 외국어로 말하니 아무것도 모른채 아마도 기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응이 긍정적이고 뜨거웠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해 기뻐했을지 모른다.
- 그러나 사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는 상황인 것을 눈치채고 놀래고 슬픔으로 인해, 여느 유대인들이 그렇듯이, 옷을 찢고 그 감정을 표출한다.
- 이들이 이렇게 반응 한 것은 말씀드렸다시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이 평생 믿어온 종교와, 그들의 생각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지식들이, 자신들이 지금 눈으로 겪은 것을 그런 모습으로 해석하게 만든 것이다.
새 피조물로써 새 일을 행하려면
- 비단 이러한 왜곡된, 그리고 사람의 사고를 제한하는, 시야가 이 루스드라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 제가 차기훈 청년이 귀국하고나서 모였을 때에, 그런 질문을 했다. “거기서 일년 살면서 깨닫거나 배운 것중에 제일 남는 것이 무엇이냐?”
-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사는게 좋은 것 같다” 라는 말을 했다.
- 외국에서, 특별히 서양권 나라에서 살아보면, 기훈형제의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보이고, 보이지 않는 차별과 무시가 그 곳에 존재한다.
- 가서 장시간 여행이 아닌, 삶을 살아봐야만 그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 것들을 경험한 뒤의 그 장소에 대한 이해는 내가 한 번도 가보기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 이탈리아 하면, 로마의 찬란한 문화들과, 찬란한 유산들이 있고, 패션의 일번지이고, 웬지 듣기만 해도 멋지다. 그 화려한 이면들이 우리가 알고 보는 이탈리아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하고 있다.
-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믿음의 여정을 시작할 때에, 성경을 읽을 때 받았던 은혜와 감동들, 그리고 내가 터치 받았던 많은 말씀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어 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이미 만들어진 시야가 때로는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 온고지신이라고 했다. 과거의 것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 보다 미래의 새로운 것을 위해 상고하는데에 의미가 있다.
- 그렇다면, 내가 체험한 은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오늘도 행하시는 새 일을 위해 존재해야하고, 말씀 또한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레마로써 새롭게 다가와야 한다.
-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도 관성이 존재하는지, 내가 느끼고 겪은 것들에 너무 익숙해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을 방해할 때가 너무 많다.
- 성경을 보라, 하나님은 항상 새 일을 행하시고, 그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부르셔서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변함 없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가, 누구에게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가에 따라, 새로운 방법들을 취하셨다.
- 무엇보다 결정적인 그 예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는 파격적인 새 일을 행하신데서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 칭하시고, 이제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셨다.
-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새” 라는 형용사는 항상 매일 아침마다 되새겨야할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일 아침마다 나를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말씀을 해주시고, 새 일을 행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루스드라인들이 새 일을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교훈삼아 새로운 미래를 향한 신앙을 갖을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한다.
결론
-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이미” 나의 지각으로 경험한 하나님이다.
- 항상 태초부터 새로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고, “새 것이 되었도다” 하시는 하나님께 “옛 것으로 머물겠다”고 하는 일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많이 본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도 많이 본다.
- 과거의 교훈과 현재의 성령님을 통해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일들을 두 눈으로 보고, 또한 누리는 “온고지신” 하시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