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에 얼마간 머물던 바울은 3차 전도길에 오른다. 사실 이야기의 흐름상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에베소인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에서 에베소에 가장 빠르게 안전하게 도착하는 방법은 사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다.
육로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통과하는 길은 높은 산과 골짝을 지나야 하는 험한 길이다. 하지만, 2차 전도여행길에 세워진 라오디게, 안디옥, 이고니움 등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바울은 육로를 통해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바울이 에베소가 얼마나 당시에 선교적으로 요지라고 여겼는지는 그가 그 곳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인구로만 보면,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 교회가 있는 안디옥에 다음가는 도시였고,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요지였다.
그런 에베소에 진작 가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제서야 허락하셔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8장에서 본 것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곳에서 사업하며 사역했고, 아볼로를 이집트에서 부르셔서 전도하게 하셨다. 아볼로가 고린도로 건너갔을 때에, 바울이 드디어 에베소에 도착하게 된다.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만나는데, 오늘은 바울과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성령님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자 한다.
본론
성령과 기독교인의 정체성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해서 어떤 제자들을 만난다. 여기서 제자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를 의미하는 것인데,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자들에게 묻는 첫 질문을 보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그것과 함께 우리가 확실히 해야하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았는가의 문제이다.
그들이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 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대답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사실 문자적으로 성령의 개념자체 혹은 존재자체를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령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개념이고,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요한도 이미 성령에 대해 예언을 했기 때문에, 알았다고 보는게 맞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 는 것은, 성령께서 오신 것,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렇게 내려오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성령이라는 것은 특별히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부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우리가 기억해야할 포인트를 발견한다. 첫째, 예수를 믿는 자는 필시 성령세례를 경험해야한다는 점이고, 그리고 둘째, 예수를 믿는 자는 특별히 선택 받은 자라는 점이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이 두가지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시기를 축원한다
성령세례를 느낄 수 있는가?
또 다른 측면을 조명해본다면, 바울이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은 질문 속에는 이런 전제가 깔려있다는 점이다.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라는 질문을 통해 기대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분명 어떤 확실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지, 애매하게 느꼈는지 안 느꼈는지 구분 안가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령님이 오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을 때 성령님이 오시고 그걸로 끝이다라고 한다면, 이 바울의 물음에 뭐라고 답을 해야할까? 음.. 글쎄.. 받은건가?
이 곳에 모인 분들은 대부분 방언을 받으신 분들이 많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을 체험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방언을 체험할 때가 어느 때인지 알고 계실 것이고, 그래서 내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체험을 했다면, 그 때를 기억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한 번은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던 시즌이 있다. 한 2주동안 지속되었는데, 잠자다가 몸이 자꾸 들썩거려서 깼다. 성령님의 임재가 내 몸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게 하고 진동시킨다. 그리고, 잠자다가 아파서 깨면, 내가 팔을 하늘로 들고 잠을 자고 있다. 성령이 내 안에서 경배케 하시는 것이다. 그 오밤 중에도.
성령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실제적인 것이어서, 원하고 갈망하는만큼 내 삶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내가 얼마나 나의 삶의 공간을 그 분의 활동영역으로 내어드리는가에 따라 그 분의 실제적인 임재는 내 삶 가운데 실제화되어 나타난다.
내 삶을 비워드리고, 성령님의 임재를 갈망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성령은 삶을 즉시 바꾼다
성령세례를 통해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오시면, 그들이 즉시 반응한다는 점이다.
에베소의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자, 바로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된다.
성령님이 오시면,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방언과 예언이 안에서 터져나온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고 했다.
성령님이 오시면, 충만, 즉 부족함이 없이 꽉차서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충만함과 즉각적인 변화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고서 이 전의 삶과의 변화를 말하기 힘들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하게 하심을 구해야한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채우시고 넘치게 하시고, 즉각적인 급진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시기를 축복한다.
성령은 공동체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고 공부하면서 성령에 대해 알게 되는 흥미로운 점 하나가 있다. 누가가 성령님이 임하시는 기사를 기록할 때에, 강조하는 포인트 하나는 성령님께서 모인 자리 가운데, 임하신다는 점이다.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임하시는 성령이 아닌, 그룹으로 모여서 예수에 대한 복음을 듣고, 세례받고, 안수할 때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강하게 임하신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점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한 분이시지만, 또한 공동체로서 온전한 연합 가운데 계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도 이 세상에서 재현해 내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혼자서 믿음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 가운데 흐르는 연합과 사랑의 개념을 크게 놓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저 착한 사람 되라고 부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마치 하나인 것처럼 연합되는 모습을 위해 부르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구원도 혼자 받는 것 아니고, 천국도 혼자가는 것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
“임마누엘” 이라고 하셨다. “엘”은 하나님이고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다. “임메카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모여 예수에 대해 상고할 때에, 그 분을 갈망할 때에,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실 줄을 믿는다.
이렇게 우리 간구하기를 원한다. 성령이여, 인정교회 공동체가 하나되어 나아갈 때에 우리 위해 충만하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결론
몇가지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알아야할 것들을 말씀드렸다.
첫째, 제자는, 특별히 선택받은 자이며, 성령세례를 경험해야한다.
둘째, 성령세례는 확실히 알 수 있는, 너무 실제적인 것이다. 내가 자리를 비워드린만큼 임하셔서 역하하신다. 체험하시기를 축복한다.
셋째, 성령세례는 삶을 즉각적으로 급진적으로 변화시킨다.
넷째, 성령세례는 모여서 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갈망할 때에 부어진다. 우리 교회가 성령님으로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