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면 보이는 것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세기 2:1-3

서론

한 동안 스님들의 책들이 인기를 누려오고 있다. 갖는 것,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피로도가 누적되는 세상이다보니, 불교의 무소유라던지, 자아성찰이라던지 하는 개념들이 나름 신선하고 긴장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그 중에 혜민이라는 분이 몇년 전에 낸 책이 큰 인기를 누렸는데,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짧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라. 멈추고 모든 삶의 관점들, 일, 사랑, 관계, 종교를 나 중심의 관점에서 보게되었을 때 다시 보이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나” 라는 강조점이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한다. 혜민은 멈추어서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가르치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오늘 나누어 보고자 한다.

본론

하나님의 안식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그치시고, 안식하셨다. 세 가지 동사가 나오는데, 일단 일을 끝마치셨고, 멈추셨고, 안식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안식이라는 것은 완성된 상태와 관련이 있고, 멈춤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완성과 멈춤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주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이제 자리를 잡으신 것과 같다. 동물이든 곤충이든 조류든 땅에 사는 것들이 갖은 공통점 중에 하나는, 자리를 잡기 위해서 자신의 거처를 준비하는 일을 먼저 한다. 그 특징이 하나님께 창조받은 DNA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도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에 그 곳에 직접 찾아오셨다. 아무 곳에나 거하지 않으셨다. 성막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의 성전을 본따 만든 성막의 구별된 장소로만 찾아오셨다. 에덴동산도 그런 공간이었다. 모든 것들을 질서에 맞게, 역할에 맞게, 만드시고나서,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셨다. 이 모습은 마치 왕이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질서있게 모든 것들과 사람들을 정렬 시킨뒤에 보좌에 앉는 모습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 후의 이 안식은 단순한 쉼이 아닌, 완성이고, 멈춤이며, 보좌 위에 좌정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이 다스리시기 위해 좌정하시는 모습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모든 질서와 생명의 중심임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삶 속의 가장 중심, 구심점은 하나님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혜민은 “나”를 보라고 했지만, 우리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일을 하든 놀든 사람을 만나든 나의 사고의 기준이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한다.

안식은 멈추는 것

관성을 모두 아실 것이다. 멈춰 있는 것은 계속 멈춰 있으려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고 하는 힘을 말한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관성이 인간에게 똑같이 대입이 된다. 한 번 멈추고 드러누우면, 움직이기가 싫고, 반대로 또 한 번 움직여서 어떤 일을 집중해서 하다보면, 중간에 그냥 멈추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 남자분들이 뭐하고 있을 때, 밥 먹으라고 하면, 관성이 한 10배 정도 증폭된다.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먹기 시작하면 반대로 먹는 걸 멈출 수가 없다. 관성에 지배당하고 있다. 안식이라는 것이 내가 스스로 멈출 수 있는 결단과, 힘이 있어야 된다. 무슨 말이냐면, 나의 자의로 의도적으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힘이 다 빠져서인던지, 아니면 타의로 멈추었다는 말이된다. 그런 멈춤은 힘이 남아있지 않다. 무언가를 할, 하나님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이 멈춤은 물리적으로 멈추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누가 억지로 시켜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내 상황이 바닥까지 떨어져서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 전에 멈추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느라 힘드셔서 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로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데, 뭐가 힘든가. 하나님은 쉬신게 아니라, 멈추신 것이다. 이런 의도적인 멈춤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왜 멈추기를 원하셨는가를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왜그러셨을까? 서두에 잠깐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왕으로서 다스리시기 위해 멈추셨다. 멈추신 것은 세상을 다 만드시고 이제 잘 굴러가니 빠지신게 아니라, 이제 좌정하셔서 본격적으로 더 관여하기 시작하신 것. 하나님은 정리되고, 질서가 있고, 안정감 있는 상태를 항상 추구하신다. 창조하시면서 하신 일이 그것이다. 어둠을 밝히시고, 혼돈을 정리하시고, 비어있는 것을 채우셨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시고 지키게 하신 것은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왕되신 하나님을 인지하라는 것이다. 바라보라는 것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30일마다로 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30일마다였다면, 쉬지않고 살아갈 사람들 많다. 멈추지 못할 사람들 많다. 7일도 이런데. 나만 보고 한 달을 산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시선의 중요성

누구나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진리 중 하나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물건도 그렇고, 말씀도 그렇고, 하나님도 그렇다. 7일마다 도는 싸이클을 가진 종교는 유대교와 뿌리를 같이 하는 것들 빼고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보통 일년 단위의 재시작을 알리는 의식들을 갖고 있지, 7일처럼 짧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하나님이 이 안식을 중요시 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를 지속적으로 교정하고 하나님께 고정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안식은 우리의 시야를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이다. 안식은 나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고, 그리고 특별히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한마음으로 그 과정을 경험할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내 삶에 어둠을 밝히시고, 무너진 것을 세우시고, 없는 것을 채워나가시는지를 몸소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멈출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안식일은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날이다. 우리가 안식 가운데 해야할 것은 왕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안식은 쉬는 것 이상으로 멈추는 것이다. 매일 하는 것들에서 한발짝 물러나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안식이 그런 것이다. 우리를 6일 동안 쉼 없이 움직이게 하는 것에서 한발짝 물러나,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삶의 주인을 다시 인식하게된다. 하나님의 싸이클은 어떤 종교보다 짧다. 그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이 시선을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교정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멈추어 왕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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