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26-29
-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서론
중간만 가라는 말이 있다. 야생에 사는 동물들을 보면, 우두머리와, 가장 약한 부류가 가장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길게 살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인간세계도 마찬가지여서, 유명해지면 그 만큼 들추어지게 되어서, 공격받게 되고, 너무 뒤쳐져도 고달픈 삶을 살게된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말하듯이 중간만 가는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쉽지가 않다. 중간만 간다는 것은 세상의 다수가 따르는 대세에 잘 맞추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텐데, 그게 여간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더 중요한 대세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말씀이다. 이삭이 나이가 들어 몸이 약해져감에 따라, 이제 가정의 기둥역할을 할 아들들을 세우고 뒤로 물러나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으로서 따라야하는 대세를 거스르기 원했기 때문이다.
본론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이삭
이삭은 태어나기 전부터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알았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삭은 첫째 에서를 더 좋아했다. 유목민족이 사냥을 잘하고 남자다운 에서를 리더감으로 삼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게 대세를 따른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전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만 따로 불러 축복하려 했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죽기 전에 하는 축복은, 후에 야곱이나 요셉이 자식들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자식들을 다 불러서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만 따로 불러서 축복하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된 것들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에서가 가나안땅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 이삭과 리브가에게는 근심거리가 되었다고 했는데, 그럴만도 한 것이, 아브라함이 하란땅까지 종과 선물을 보내서 신중하게 리브가를 데려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에서의 행동은 근심이 될만하다. 그래서 아마도 에서에게 재산과 축복기도를 주어 독립시키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반되는 다른 길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약속하신 땅을 주시고, 나라들을 가운데 본이 되는 나라가 되게하려 하셨다. 가나안땅을 떠나서도 안되고, 이제 그 곳에서 정착해서 살아야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의 복을 이삭 마음대로 에서에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뜻을 앞서가는 리브가
반대로 아내 리브가의 바램은 하나님의 뜻과 방향이 맞았다. 물론 리브가의 의도는 하나님을 따른다기 보다는 야곱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욕심히 너무 과했다. 이삭의 계획대로라면 에서가 떠나갈수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누가 떠나나? 사랑하는 야곱이 형을 피해 멀리 떠나가게 된다. 야곱은 집에서 떠나 20년을 고생한다. 리브가가 상당히 강한 어조로 야곱에게 모든 계획을 말하고 명을 따르라고 말하는데, 구약성경에서 여자가 “명하다”는 문장은 정말 희귀한 단어다. 그만큼 리브가가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혔다는 뜻이다.
결국 리브가의 계획과 바람대로 이삭을 속이고 야곱이 에서 대신해 축복을 받는다. 그런데, 그 축복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삭의 축복 안에서 발견된다. 28절,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축복은 사냥을 하는 유목민 에서에 대한 축복이 전혀 아니다. 야곱에게 최적화되어있다. 결국 하나님은 이삭의 입을 통해 축복하실 때, 의도하신대로 야곱을 위한 축복을 하게 하셨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을 억지로 당겨 쓰려고 하니 탈이 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야곱은 수 십년을 고생하며 살아가게된다.
감사와 자족으로 걷는 길
이삭은 자신이 금방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삭은 그 후로도 오래 살았다. 야곱이 20년 후에 돌아와 당시 야곱의 막내 아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기 10여년 전까지도 생존했다. 이삭과 리브가는 서로 경쟁하듯이 그렇게도 조급했고, 앞서가고, 거스르려고 했다. 부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완력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 부인이 남편의 뜻을 그렇게 완강히 반대하는 것도 그렇고, 리브가가 야곱에게 이삭을 부르는 호칭도 “네 아버지” 라고 칭하고 있다.
이삭과 리브가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할 때에 그것을 거스르려고하면 안된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때는 알기 원한다고 하다가, 분명해지면 순종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기대하던 그림이 아니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이삭처럼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 뿐만 아니라, 리브가처럼 멈추지 못하는 것도 경계해야한다. 리브가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방향이 같았지만, 먼저 앞서가고 말았다. 여기에는 신뢰의 문제가 연결되어 있다. 내 눈 앞에서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움직여버릴 때가 있다. 그 결과는 야곱의 긴 고생으로 이어지고 만다. 형이 무서워 도망간 그 길에서, 속고 또 속고,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된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따라가고, 멈추실 때에 멈추는 신앙이 필요하다. 그 이상 욕심을 부리면 그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했다. 이렇게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감사와 자족이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자족이 없을 때에 우리는 고생을 하게된다. 감사와 자족의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성막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며 움직였던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 움직이실 때 따라 움직이고, 멈추어 계실 때 흔들림 없이 멈추어 있었다. 욕심을 부렸을 때에, 항상 위기를 맞았고, 순종한 자들이 결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만족과 감사가 없으면, 욕심이 나고, 욕심은 시험과 죄를 낳는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며, 발걸음을 맞추며, 감사와 자족으로 바른 길로 걸어가야 한다. 그 어떤 기준 보다 하나님을 기준 삼고, 그 어떤 대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른 길로 걸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