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뜬 신앙

창세기 19:9-14

  1.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2.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3.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4.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5.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6.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서론

“눈 뜬 장님” 이라는 말을 쓴다. 실제로 장애가 있으신 분들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볼 수 있는데, 보지 못하는 사람들, 봤으면서도 못 본체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소돔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는 일.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일어나는 이 일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본론

눈 먼 소돔 사람들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던 하나님과 두 천사들이 소돔을 향해 떠나갔다. 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두 천사가 도착하자 극진히 자신의 집으로 맞아드리려고 한다. 고대 시대에 나그네들을 관대하게 대접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양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전쟁을 겪고,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들을 건진 소돔 사람들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유일하게 이민자였던 롯은 그 상황을 인지하고 그들이 길거리에서 잠을 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거부하는 그들을 강권하여, 거의 억지로 하다시피 자신의 집으로 들인다.

밤이 되자 소돔 사람들이 노소 가릴 것 없이 원근에서 모여 롯의 집으로 몰려 들었다. 롯은 조용히 말로 해보려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고, 오히려 이민자인 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위협만 받는다. 더 이상 기다려 주지 못하고 천사들은 정체를 드러내며, 모여든 이들의 눈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구약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은 아주 드믄 상황이다. 구약에서 이 구절을 포함해 단 두번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눈이 보이지 않게된 이 아비규환이된 상황에서도 그들은 땅을 더듬으며 롯집의 문을 계속 찾는다는 점이다. 약간은 웃기기도하고, 징그럽게도 느껴지는 이 장면은, 그들이 좇고 있는 소욕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알게한다.

우리 같으면 너무 충격적이고, 무섭고해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려 할텐데, 못보게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좇고 있었던 것만 따라간다. 그런데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매일 하는 생각, 행동들에 대해 하나님은 성령하나님을 통해 어떤 싸인을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계속 그것을 멈추지 않고 한다. 소돔성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안녕한가

소돔성 사람들 뿐만이 아니다, 롯은 사위가 될 사람들을 찾아간다. 이제 여호와께서 소돔성을 멸하실 것이니 이 곳을 떠나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긴다. 실제로 눈이 보이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영적이 눈이 닫혀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맞게된다.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의 눈은 안녕한지 물어보고 싶다. 신약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눈 이야기는 아무래도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던 장면인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믿고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보고있지 못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가려 보지 못하게 되고나서야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고,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눈은 제대로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금 제대로 보고 있다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많은 경우, 내가 보고 싶은대로, 믿고 싶은대로 하고 있다.
내 육의 눈이 안 보여야 영의 눈으로 보게된다. 영안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나의 눈으로 보는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실 수 있기를 축원한다.

눈 먼자 눈을 뜨게하시는 예수님

시력이라는 것이 상실되었다가 회복된다는 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도 쉽지 않은 일인데, 예수님의 시대에는 더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 오셔서 하신 일 중에, 보지 못하는 맹인을 보게하신 역사가 있었다. 하신 많은 일 중에 기록된 일들은 그 만큼 기억될 만하고 영향이 있었던 일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못 보던 자를 보게하셨다. 예수님 외에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할 수 있었던 것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말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아서 그렇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 했다. 우리가 나의 욕심과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하는 건가? 우리가 겪는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항상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을 통해 내가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그런 삶을 사셔서, 눈을 뜬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소돔 사람들은 자신의 소욕만을 보며 살아왔다. 못보게 되어도 끝까지 그 소욕만 쫓아간다. 롯의 사위들도 마찬가지다. 영의 눈이 어두어 무엇이 오는지도 몰랐다. 우리의 시야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의 즐거움과 추구 때문에,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멈출 수가 없다. 예수님 오시었다. 눈 먼 자 눈을 뜨게하셨다. 불가능했던 일을 하셨다. 주님 밖에 그렇게 할 자가 없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죽음이 아닌 생명길로 가게된다. 매사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하실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눈 뜬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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