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5-18

서론

오늘 설교제목이 꽤나 심각한데, ‘삶의 목적’ 과 같은 주제는 사실 그렇게 자주하게 되는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어릴 적 친구들이 생일이 되면 장난으로 “생일 축하합니다~” 라는 가사를 “왜 태어났니~” 로 바꿔서 부르던게 생각이 난다. 뭐도 못하는게, 혹은 얼굴도 못생긴게, 등등 험한 말을 우스게로 섞으며 놀리곤 했다. 물론 생일축하니까 다들 화 안내고 들어주긴 했다.

본론

창조의 목적

나는 왜 태어났나라는 질문에 사실 본인이 대답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만나셔서 가정을 꾸리셨고, 우리는 그래서 태어났다. 특수가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는 뭐가 될거야,” “너는 어떤 일을 하게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부모님도 드물다. 하지만, 이 질문을 조금 바꾸면 우리 스스로가 대답할 수 있을만한 질문이 된다. “나는 왜 살고 있나?”

성경에서 출생부터 참 드라마와 같았던 인물은 모세이다. 그가 왜 태어났나고 물으신다면, 하나님의 계획을 언급할 수 있겠으나, 모세 입장에서는 어려서부터 큰 고민거리이고, 고뇌하게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왜 난 히브리인인데, 애굽의 궁궐에서 살고 있는가. 왜 나는 버려졌고, 건져졌고, 그리고 왕자가 되어 있는가. 그런 모세의 깊은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은 출애굽기에서 애굽인들을 향해 한 그의 행동을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다. 결국 모세는 출애굽을 시키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뵙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준비시키시고, 찾아오실 성막을 짓도록 꼼꼼하게 명하신다. 모세의 삶의 목적, 왜 태어났는지가 이 포인트에서 예상이 되시는가? 하나님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기 위해서 모세는 태어났고, 살게 된 것이다.

신약으로 와서 바울의 삶을 생각해보자. 그는 율법에 대한 열심히 있었고, 총망 받는 인재였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열심히 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삶의 방향이 틀어졌다. 그 후로 바울은 계속해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복음을 들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성령님이 찾아오시고, 삶이 변화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온 땅의 성도들의 삶 속으로 찾아오시기 위해 태어났고, 살았다. 창조의 목적은 임마누엘이다. 우리와 함께 그 분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함께하시기를 원하신다.

율법에 나타난 창조목적

구약의 율법을 읽다가 보면 참 많은 조항들이 있고, 지키기 힘들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복잡한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창조의 목적이 임마누엘이라면, 지켜야하는 삶의 법칙들은 당연히 그것과 관련이 있다. 율법의 목적은 그 율법을 지키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실 만한 나라가 되도록,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율법에는 읽다보면 조금 의아한 부분들도 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법을 칼 같이 정하셨을까 정도 없으시게” 예를 들면, 몸이 성치 않은 자들을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몸이 불편한 것도 속상한데, 너무 매몰차게 구시는 것은 아닌가? 그 법만 처다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는게 맞지만, 전체를 보자. 하나님이 추구하시고 계신,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하나님 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없을까? 없다. 율법은 장차 올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통독을 시작하면 창세기에 나름 재밌는 이야기 거리들이 가득하고 출애굽기의 그 화려한 스토리에 흥미가 생기다가 전체의 중간 지점인 20장에 들어서면 갑자기 율법이 가득하고, 무슨 성막 만드는 이야기가 20장 동안 지속된다. 통독의 첫번째 위기다.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설명된 성막설계와 건설은 다 이유가 있다. 에덴동산을 만들기까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찾아오실 성막을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창조와 같기 때문이다. 율법과 이 모든 성막설계의 목적은 결국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찾오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창조목적

그렇게 복잡한 율법을 예수님이 다시 정리 요약해 주셨다. 사랑하라. 그러면 너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이되고. 나도 너의 안에 거하게된다. 무슨 말인가? 율법의 목적은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 오셔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다. 왜인가? 구약의 율법에서 본 것 같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없다. 우리도 예수님께 고침받고, 치유받고, 채워지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강자와 약자가 없이, 같이 뒹구는 곳이기에 그렇다. 천국을 맛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회복이 일어나는 것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할 것 같다. 우리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하루하루 살까. 왜 아이들은 열심히 키워야하고, 왜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할까.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답은 안나온다. 우리는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의 삶을 정의해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 나의 삶을 존재하게 하셨다. 나의 삶을 축복하시고, 고치시고, 채우시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삶을 추구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애초에 잘 살게 하려고 낳는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 함께 사는데 기왕 사는거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잘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추구하며 살고 있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생사화복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나. 창조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 오셔서 율법을 주셨다. 그 율법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그 관계를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왜? 그런 곳에 하나님이 임하시기 때문이다. 창조목적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안에 거할게 너도 내 안에 거하라.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하냐면, 하나님 사랑하고 서로 사랑해야해. 우리는 사랑으로 함께하기를 위해 창조 받았다. 여러분 왜 사십니까? 이 질문에 이제 확실히 답을 하실 수 있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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