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를 통해 보는 우리의 신앙

사도행전 16:27:34

  1.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3.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4.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5.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6.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7.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8.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서론

  1. 감옥에 갖혀 있던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죄수들 가운데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큰 지진이 나 감옥문이 다 열리고,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
  2. 그 순간에 오늘 주인공 “간수”가 등장한다. 이 간수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어지는 그의 행동들에서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본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신앙

  1. 간수는 문이 열린 것을 보고죄수들이 다도망한 줄로 생각하고 자결하려 한다.
  2. 감옥은 어둡고, 횃불 몇개 켜있을 것이고, 지진이 났으면 분명 소란스러워야 하는데, 침착하고 조용하니, 다 도망갔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3. 간수는 죄수를 지키지 못했으니, 자신의 삶으로 대신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순간 자결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4. 우리가 살면서, 보이는 것, 눈으로 보는 것에 반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5:7 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5.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눈에 보이는 것 만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할 줄로 믿는다.
  6. 간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실체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 구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어두울 때도, 우리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의 실체는 소망이요, 희망인 것을 믿으라

임재 앞에 엎드리는 신앙

  1.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린다. (이 단어는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무서워 하던 것과 같은 단어이다)
  2. 어둠가 절망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희망을 보았을 때에, 간수의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본 것은 사람의 힘이나 운이 아닌, 절대자의 임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3.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는 어쩌면,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 경배일 것이다. 
  4. 나의 삶에 역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앞에 겸손히 엎드려 의지하는 자세를 갖을 수 있기를 축복한다
  5.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엎드리고 경배하는 것을 본다. 다윗은 말할 것도 없다. 슬플 때도 하나님 앞에서, 기쁠 때도 하나님 앞에서, 화가 날 때도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고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6. 바울과 실라는 어떤가? 어두운 감옥에서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주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그 앞에 경배할 수 있는 우리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

  1. 간수가 신의 임재를 느낄만큼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에 가득차 바울에게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으리이까?”
  2. 직역하자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무엇을 해야합니까?” 이다. 이 반드시라는 완곡한 표현은, 고대 사람들이 “신”과 관련된, 한마디로, 삶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그 만큼 간수가 이 사건을 신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3. 지금 상황이 “지진”을 겪은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가 염두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 한 줄 “이에 갑자가 큰 지진이 나서” 라고 읽었기 때문에, 크게 다가오지 않겠지만, 그리고 우리나라가 큰 지진을 자주 겪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느낌이 없지만, 마치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것처럼, 그 안에 우리가 갖혀 있다가 구조된 것처럼, 이 상황이 얼마나 격양되고, 흥분되고, 감정이 휘몰아치는 상황인지를 우리는 생각해 봐야한다. 
  4. 자고 있었다. “큰 지진”이 있었다. 깨어 났는데, 옥문이 다 터져 있다. 죽음을 피해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긴하나, 다른 이유로 또 죽음이 눈 앞에 있고, 그 몰아치고 겹겹히 순간적으로 다가온 위기 상황을 해소해주는 바울의 한마디 큰 외침 이였다.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5. 이 외침에 간수는 신의 부르심 같은 것을 느끼고 엎드린 것이다. 간수가 한 질문은 유대인들의 “어찌할꼬” 라는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이 질문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전매특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후에 유대인들 또한 마음이 찔려 어찌할꼬 물었다. 그때 베드로는 회개할 것을 요청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라고 요청한다. 
  6. 이 짧은 말 속에는 몇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 일단 “주” 라는 말이다. 로마시대에 주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써 확실한 상하 관계다. 주인을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너의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서서 새로운 주인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황제이고, 그것은 그가 섬기는 모든 우상들이고, 그것은 그 자신이다. 
  7. 그리고 두번째는 “믿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은, 의지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8.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히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생아들은 온전히 부모에게 의지한다.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그 모든 것을 부모 없이는 할 수 가 없다. 의심의 여지 없이, 부모를 의지한다. 
  9.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모습은 온전한 의존이다. 예수님에게 의존하는 삶. 무거운 멍애를 지어주겠다 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가 지고 가려고한다. 
  10. 간수가 구원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것은 돌이켜 새로운 주인을 섬기며, 온전히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11.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이 두가지를 때때로 잊고 산다. 이 두가지, 주인을 바꾸는 것과, 의존하는 것이, “반드시” 해야할 것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주님의 열심

  1. 간수와 그의 가족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과 주의 말씀을 듣게 된다. 33절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장면을 본다. 간수는 피범벅이 되어 있을 바울과 실라를 씻겨준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이 장면에서 씻겨지고 있는 것은 바울과 실라 뿐만이 아니다. 세례를 받아 씻겨진 것은 오히려 간수와 그의 가족이다. 
  2.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은 항상 이런 것 같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는 것 같지만 주님이 나를 위해 하고 계시고, 내가 시간들여 교회에서 헌신하는 것 같으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신실하게 일하고 계신 것이다. 
  3. 목회자 자녀 중에는 그런 친구들이 많다. 교회에 반주자가 없어서 악기를 배우고, 누가 한 악기를 맡으면 다른 악기를 채우고 하다보니, 모든 악기를 다루는 다능한 친구들이다. 그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 것 같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4. 우리가 이 두가지를 다 한다고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 더 힘들 것 같은가? 내가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는 것과, 누군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5. 나의 헌신이 사실은 주님께서 열심을 다하여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신 것임을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한다. 

사랑과 희생의 신앙

  1. 34절에서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이제 자기 집에 간다. 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온 집안과 교제를 나누며 기뻐한다. 사실 매우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죄수를 자기 집에 데려가서, 한참 굶고 있는 바울과 실라를 위해 음식을 차려 대접한다이미 지진에서 살아남은 간수, 그리고 자결 문턱 앞에서 구원을 받은 간수는, 두려운게 없다. 
  2. 그런 간수에게 바울과 실라 또한 그 환대에 정중히 반응해 준다. 이 간수는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도 아니었고, 그냥 로마인이다. 하나님의 하 짜로 모를지 모른다. 당연히 내어온 음식도 전혀 코셔 음식, 정한 음식이 아닐 것이다. 이런 자리에서 바울과 실라가 이건 괜찮으니 이것만 먹겠다. 라며 분위기를 깼을리 없다. 
  3.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 음식 문제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 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뭐 어디에서는 원숭이의 뇌를 먹는다는 이야기도 들어 봤는데, 만약 부정한 음식을 내놓고 식사를 시작했다면, 그것과 유대인들에게는 진배 없다. 불결한 것이다. 
  4. 이들은 이렇게 서로에 대한 희생과 배려로 이 식탁 앞에서 하나의 교회로 거듭난다. 
  5. 주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은 이렇게 항상 우리를 희생과 이해와 배려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 안에 이러한 희생과 사랑이 있다면, 오늘 본문의 간수의 가정교회처럼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는 일” 넘쳐날 줄로 믿는다. 

결론

  1.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2. 첫째, 보는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3. 둘째, 우리는 환난 가운데, 하나님께 엎드려야 한다.
  4. 셋째, 나의 주인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해야만 한다.
  5. 넷째, 우리의 헌신을 통해 주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어야 한다
  6. 다섯째, 사랑과 희생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7. 이런 신앙인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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