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7일

척하면 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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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1-7

예배일시

2021년 1월 27일

창세기 15:1-7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서론

무슨 일이든지, 오랜시간 같이 손발 호흡을 맞추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원하는 것을 알고 해줄 수 있게된다. 대학을 다닐 때였는데, 선교단에서 음향을 담당하고 있었다. 대학교 강당의 맨 뒤에 음향기기가 있고, 맨 앞에 무대에서 도와주는 스탭이 있었는데, 강당이 꽤 커서 그거리는 50m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 계속하다보니, 큰 소리로 스탭의 이름만 불러도 이 타이밍에서 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오케이 싸인을 보내고 그것을 해준다. 다른 사람하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 척하면 착하는 경험을 하고나면, 답답해서 다른 사람하고는 일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뭔가 돈독함이 생긴다. 오늘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척하면 착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

본론

희미해져갈 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먼 곳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집과 가족들이 줄 수 있는 모든 안전바를 포기하고 왔다. 그의 바램대로라면 가나안에 왔을 때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극심한 가뭄이 찾아와 그 ‘약속된 땅’을 스스로 포기하고 애굽으로 이민을 가야만 했다. 애굽에서 그래도 재산이 많아지고 긍정적인 것을 경험하고, 다시 약속을 생각하며 가나안에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큰 민족을 이루는 대신, 같이 있던 가족하고도 헤어져 살게된다. 하나님은 분명 약속을 하셨고, 아브람을 반응했는데, 점점 그림이 선명해지지 않고 희미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롯이 거주하는 소돔 지역에 전쟁이 나 롯과 가족들이 다 끌려간 것을 간신히 쫓아가 구출해 오는 일도 발생했다.

아브람이 많이 힘들고 지쳐서였을까. 하나님은 아브람을 찾아오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전쟁을 치룬 아브람에게 방패라고 위로하시는 것은 위로의 말씀일텐데,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아브람은 마치 꼬투리를 잡듯이, 따지듯이, 대답한다. “상급이시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약속하신 자손도 아직 없는데요?”

보여주시는 ‘척’하신다

“자식이 없으니, 양자에게 모든 것을 상속하겠습니다” 라고 항변하듯이 말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대답하신다. “아니야. 그 사람이 아니라 너의 자손이 상속자가 될 거야.” 그리고 나서는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시더니, 밤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는 “척”을 하신다. 하나님이 연기를 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오늘 제목처럼 아브람에게 먼저 “척” 하셨다.

그런데, 생각을 한 번 해보자. 하나님이 그냥 이삭을 환상으로 보여주실 수는 없으셨을까? 왜 굳이 별들을 보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여기서 강조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많은” 이다. 당시 고대사람들은 별을 셀 수 없다고 여겼다. 서울에서야 보이지 않지만, 별은 셀 수 없다고 여기는게 맞을 정도로 밤하늘에 가득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여주신다. 약속하신 바를 우리가 고대하는 그림은 아닐지라도, “척” 보여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를 못한다. 큰 뜻 말고, 작아도 되니까 확실하게 보여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많은” 말고 “이삭”을 보고 싶어한다. 그 것이 내가 원하는 그림이니까.

믿는 ‘착’한 아브람

하나님이 이렇게 ‘척’ 하고 보여주시니, 믿는 ‘착’한 아브람을 본다. 아브람이 밖에서 셀수도 없이 많은 별을 보더니 여호와를 믿었다. 하나님께서 척하시니 아브람이 착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그런데 여기서 ‘의’라는 단어를 한 번 짚고 넘어가야하겠다. 구약에서 ‘의’라는 개념, 특히 모세오경에서는 이 ‘의’라는 것은 항상 사람의 행동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신약에서 말하는 믿음과 의를 거의 동일시하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주실려면, 아브람이 무언가 행동을 했어야만 한다. 의로운 행동을. 그런데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것이다. “여겨주셨다.” 다시말하면, 그럴만한 사항이 아닌데, 여겨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삶을 살아야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인데,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르게 ‘착’ 하고 반응을 했더니,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가 한게 없는데, 의로운 삶을 살지도 않는데, 우리를 그 믿음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척’ 보여주시면, 우리는 ‘착’하고 반응하면 된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분명히 보여주신다. 믿으라고, 확신을 가지라고, 두려워말으라고, 나는 너의 큰 상급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라고 반응 못하면, 나만 손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척’ 하고 다가오실 때에, ‘착’ 하고 반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결론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꿈을 그리면서 가나안에 왔는데, 잘 풀리지 않았다. 심지어 땅도 포기하고 애굽에 살다온 상태인데, 늙어가고, 자식은 없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희미해져 보인다. 전쟁도 치루고 나니, 이제 인생도 끝이 보이는 것 같고, 약속의 성취를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다. 하나님이 그때 하신 것은 “보여 주신 것이다” 별을 보여주셨다. 많은 자식을 환상을 보여주신 것 아니고, “많은” 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확실히 보여주시는데, 우리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이삭”만 보고자 하지는 않는가 생각해본다.

구약에서 의로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활동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런데 별을 보고 믿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셨다. 아브람은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무언가를 한 것”처럼 여겨주셨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에 대해 바른 반응을 한 것을 옳은 행동으로 여기셨다. 이 말씀이 구약에서 유일하게 믿음이 의로 여겨진 구절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은 척하면 착이다. 말씀에 반응하셔서, 받으시고 취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