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증가를 경험하라
사도행전 12:18-25
18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서론
베드로의 탈옥이 알려지고 헤롯왕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에 거스르는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본론
삶을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정렬하라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고 있었다. 성령의 음성대로 움직였고, 복음을 전했고, 열매를 맺었다. 하나님 나라의 일과 완전히 정렬되어서, 하나님의 역사가 베드로의 삶을 통해 나타났다.
베드로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는 방향성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삶이 어느 쪽으로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다.
강으로 치자면 하나님 나라라는 이 강줄기 흐름 안에, 베드로가 맡은 한 줄기의 물 줄기가 있다. 그리고 수많은 다른 물 줄기들이 하나의 강을 이루고 있다.
강줄기는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다. 막으면 돌아서 다시 가던 줄기로 돌아오고, 댐으로 막는다 하여도, 계속해서 증가할 뿐이다. 언젠가는 흘려 보내야만 한다.
아담이 살 던 에덴 동산의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점점 넓어져 왔다. 중간에 이 증가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안에서 조금 삐긋하는 듯 했지만, 결론은 막힌 댐을 넘어, 다시 터져나와 온 지구를 교회를 통해 덮어가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오늘 살아온 하루를 돌아본다면, 우리가 그 강줄기를 따라 살았는지가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점점 넓어져가는 그 전우주적 흐름 속에서 내가 하루를 살았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삶을 통해 넓어지려면 나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리가 여호수아처럼 창검을 들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무엇을 했는가를 돌아보면 답이 나온다. 하나님은 그 땅에 살던 족속들이 그 땅에 저지른 죄악 때문에 그들을 몰아낸다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의 전쟁은 죄악과 우상과 무죄한 피 흘림을 몰아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그 역할을 하려면, 우리는 세상에서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하는 행동들, 잘못된 일인지는 알겠는데, 보편적으로 행해져서 양심에 무뎌진 것들, 그런 행동들을 개선하는 것에 힘 써야한다.
눈에 띄지 않고, 불법을 행하는 것도 아니나, 결코 빛이나 소금의 역할과는 거리가 먼 것들. 살다보면 그런 것이 많다. 포기하기 힘든 것들, 소소하지만, 쏠쏠한 것들.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 행하려고 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경험하는 것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우리의 삶을 정렬하면, 베드로의 삶이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하나님 나라의 강줄기를 따라 막아서는 것들을 넘어 흐르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장애와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할 줄로 믿는다.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라
헤롯왕이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그들을 죽이라 명한 뒤, 유대지역을 떠나, 자신의 본거지인 가이사랴로 돌아간다.
로마 법전에 의하면, 파수꾼이 죄수를 놓치면, 죄인이 받을 처벌을 대신 받는다. 베드로는 죽음 앞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헤롯이 상당히 이 사건의 실패에 좌절 했다는 점이다. 19절이 원어를 보면 그리고 라는 접속사로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베드로를 찾아도 보지 못했기에 좌절하고 답답함에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갔다는 표현이다.
그가 기독교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두로와 시돈 지역과의 관계가 잠깐 언급되는데, 두로와 시돈은 유대와 갈릴리 북부의 해안 도시인데, 갈릴리 지역의 곡물에 의존을 할 수 밖에 도시들이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그립바의 미움을 샀고, 관계 호전을 위해 헤롯에게 아부를 하는 상황이다.
21절에 이 관계에 대해 어느정도 회복하고 기념 연설 같은 것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왕복을 입었다고 했는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전체가 은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나왔다고 한다.
결정적인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람들이 신의 소리라 하며 그를 높이는데, 그의 반응이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요세푸스가 좀 더 자세히 말하고 있는데, 그들을 꾸짖거나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사실 황제를 신으로 숭상하는 경우는 로마시대에 당연한 일이었으나, 보통 살아 있는 황제나 왕을 신으로 섬기지는 않았다. 특히 아그립바는 유대인의 전통을 잘 알고,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이 행동은 사실 작은 일 이 아니었다.
결국 아그립바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쳐서 죽게 된다. 요세푸스는 그가 알 수 없는 복통으로 시달리다가 5일만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사람 몸에 기생하는 벌레 때문이 아니었나하는 예상들을 한다.
하나님의 심판보다 우리가 집중해봐야할 부분은, 누구를 높이는가의 문제일 듯 하다. 아그립바는 자신을 높이는 목소리에 만족했다. 딱 사탄이 주는 마음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것, 그것이 사탄이 원하는 것이다. 사탄은 자신을 섬기는 것 자체에만 열심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일단 싫다. 그래서 하와에게는 하와의 본능을 건들였다. 먹어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것 같고. 딱 바울이 말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사탄은 우리를 이 세가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나 자신의 욕구에 집중시킨다. 유럽에서 일어나 인본주의 사상도 결국은 다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요즘 미디어의 중심은 하나님은 둘째치고, 우리도 아닌 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있는가? 나, 나 하고 있지는 않는가?
히브리서 6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이 말은 우리의 신앙이 기본적인 복음을 넘어서서 성숙해지고 버티는 근육이 생겨야 하는데, 계속 다시 기초만 닦는다는 것이다.
이지가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해서, 말할 때마다 이지, 이지 그런다. 나 뭐 해달라고. 우리의 신앙이, 나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 더 높은 차원의 부르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일에 눈을 떠야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지, 이지 이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을 들어 내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으로 온전히 서게 되실 때에,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그 하나님 나라의 강줄기에 흐르며 멈추지 않는 증가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삶의 증가를 위해 하나님께 ‘반’하지 말라
마지막 24-25절을 끝으로 이제 사도행전은 사도바울의 선교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에 그 한 섹션을 마무리하는 클로징 맨트가 흥미롭다. 헤롯이 죽으니라… 바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넌 죽었냐? 우리는 산다. 약간 얄밉기 까지 할법한, 그런 받아침이다.
이 말씀에 우리가 취해야할 삶의 원리가 또 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일에 반대하여 거스르던 헤롯 아그립바가 죽음을 맞이 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거침없이 증가하고 흥황해 갔다.
우리의 삶이 하나남의 나라의 일에 정렬되어 그 강줄기를 타고 흐른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것 같이 흥황한다는 것이다.
삶의 증가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한다.
결론
몇년 전에 수영을 처음 배울 때는 25미터를 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몇년을 꾸준히 했더니, 힘이 빠지면서, 수영의 가장 기본을 가장 나중에 배웠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앞에 있는 물을 잡아서 당긴 만큼 내가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나아갈 때에 물의 흐름에 저항을 최소한 으로 해주는 것이 수영의 기본이다. 물이 나를 타고 흐르게 나의 몸을 펴주어야 한다.
모든 운동이 힘이 빠져야 잘하게 되는데,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힘을 잔뜩 준다고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빠르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천천히 가거나 빨리 가는 것과는 관계 없이 강줄기 같이 흘러 그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의 삶을 온전히 그 물줄기에 맡기고 정렬하여 흘러가는 것이 그 흐름에 맞서지 않고, 방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길일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나라와 같이 증가를 경험할 줄로 믿는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정렬하고, 삶의 리더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서지 않는 삶을 사심으로 무한한 증가를 경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